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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버려진 산업유산, 다시 인간의 품으로…

입력 | 2013-11-23 03:00:00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김정후 지음/328쪽·1만6000원/돌베개
제철소 부지에 친환경공원 짓고 가스저장고, 공동주택으로 활용
‘유럽의 재생 프로젝트’ 소개




영국 런던의 수력발전소를 개조한 ‘와핑 프로젝트’의 레스토랑. 수력발전소 내부의 설비를 대부분 그대로 둔채 독특한 인테리어로 활용했다. 돌베개 제공

이 책의 제목만 보고 곧 테이트모던 미술관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국 런던 템스 강변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잘 알려진 대로 흉물로 방치되었던 화력발전소를 성공적으로 개조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나라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2000년 테이트모던 개관 5개월 뒤 런던 동부에는 일명 ‘베이비 테이트’가 문을 열었다. 소규모 수력발전소를 갤러리와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와핑 프로젝트’다.

1890년 건립된 와핑 수력발전소는 주변 항만과 런던 전역에 쓰이는 전기를 생산하다 수력발전의 효용성이 떨어지자 1977년 문을 닫았다. 영국 정부는 이를 보존 건물로 지정했고, 이 건물의 가치를 알아본 호주 출신의 예술가 줄스 라이트가 건물 사용 권리를 인수했다. 건물 자체를 그대로 둔 것은 물론이고 발전소 내부의 설비 시설도 멋진 인테리어로 여겨 대부분 원래 위치에 둔 상태에서 녹과 기름때만 제거했다. 7년의 노력 끝에 이곳은 갤러리와 레스토랑으로 재탄생했다. 녹슨 기계 옆에서 식사를 하고 비밀창고 같은 지하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는 이곳은 곧 런던의 명소로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는 10년째 런던에서 활동 중인 건축가이자 도시사회학 박사다. 그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기능을 다한 산업용 건물을 훌륭하게 재활용한 사례 14가지를 소개한다. 일명 ‘산업유산의 귀환’이란다. 주로 산업혁명 이후에 건립된 산업용 건물과 시설이니 길게는 200여 년, 짧게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발전소뿐 아니라 철도 양조장 가스공장 탄약공장 감옥 제철소 탄광 항구 조선소 빵공장 도축장 같은 산업유산이 원형은 그대로 유지한 채 약간의 개조만 거쳐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공원 호텔 주거지 사무실 상가 식당으로 변신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유럽은 이미 산업유산의 재활용에서도 선도적이다. 도심 한복판에 세워졌던 산업 시설들은 시간이 흘러 도시 규모가 커지고 운송수단이 발달하면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한때 도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던 산업유산들은 방치되어 흉물로 전락했다.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 결과 그곳의 장소성과 시간성을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이다. 낡은 것, 기능을 다한 것을 부끄럽고 추한 것으로 여겨 모조리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데 익숙한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신선하고 놀랍다. 독일 뒤스부르크는 광활한 제철소 건물과 용지를 친환경공원으로 탈바꿈시켰고, 프랑스 파리는 방치된 고가 철로에 나무를 심어 ‘프롬나드 플랑테’라는 공중 산책로를 꾸몄다. 오스트리아 빈은 가동을 멈춘 가스 저장고 4동을 공동주택 쇼핑 문화시설을 갖춘 마을인 ‘가소메터 시티’로 활용한다.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웠던 점은 애초에 이들 산업유산이 미래에 성공적으로 재활용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업용 건물이라고 하면 디자인보다 기능이 우선시되는 편이고 아예 혐오시설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유럽의 많은 도시는 주요 산업용 건물이 도시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현상 설계를 할 정도로 신중했다. 1899년 건립된 빈의 가스 저장고는 유서 깊은 도시 분위기에 걸맞게 붉은 벽돌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 때 건축가 필리프 자코브 맨즈가 디자인한 독일 카를스루에의 탄약공장은 수려한 건물로 평가받았기에 훗날 미디어아트센터로 변신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건물 재활용은 경제적일 뿐 아니라 역사성과 친환경성이라는 가치도 담게 된다. 산업유산이 재활용되는 과정에서 지자체와 시민들이 오랜 논의와 치열한 협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은 시민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내 공무원들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이 책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서울에는 옛 정수장 시설을 생태공원으로 재활용한 선유도공원, 버려진 수도가압장을 개조한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국내에서도 이런 시도가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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