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형벌, 흉악범의 가족]<上> “피해자는 더 할텐데…” 말 못하는 고통의 나날아내의 ‘고통’
강도 살인을 저지르고 무기수로 복역 중인 남편이 류은희(가명) 씨에게 보낸 편지.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범행일이 다가오던 2003년 10월 초부터 남편은 3, 4일씩 외박이 잦았다. 은희 씨의 전화를 받으면 "친구 소개로 업소에서 색소폰을 분다. 먼 데 있는 곳이라 나오면 여기서 며칠씩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한 기술도, 직업도 없던 남편은 색소폰을 잘 불고 노래를 곧잘 했다. 교회 행사를 다니며 연주를 해주고 '기름값'으로 5~10만 원씩을 받아오던 남편이었다. 걱정이 됐지만 가사도우미 일에 바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은희 씨는 남편이 검거된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돌을 막 지난 늦둥이 딸을 안고 남대문시장에서 장을 봤다. 남편의 전화가 와 짐을 든 채 엉거주춤 받았다. 행사에 다닌다던 남편은 한참 말을 못하더니 "경찰에 잡혔다"며 울먹였다. 손에 든 짐은 놓쳤고 품속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경찰 조사를 받으며 남편이 결혼 전 상습 절도 전과로 수차례 복역된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 형사는 "아는 척은 하지 말라"며 "(남편이) 아내에게는 숨겨달라고 했다"고 했다. 배신감과 공포감에 휩싸였다. 은희 씨에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일하던 교회 옆 식당에서 만난 남편은 은희 씨와 은희 씨가 전 남편과 낳은 아들을 모두 아꼈다. 결혼 후 함께 트럭을 사서 군밤,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어렵게 살림을 이었다. 2000년 남편이 사기 사건에 휘말려 2년 간 모은 전 재산 8000만 원이 날아갔을 때도 무릎 꿇고 우는 남편을 은희 씨는 버리지 못했다. 그 남편이 하루아침에 살인범이 돼 있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매일 TV로 7시 아침 뉴스와 9시 저녁 뉴스를 챙겨봤다. 망연자실해 집에 있던 어느 날 저녁 켜져 있던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기자는 남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설명했다. 화면에서는 남편이 경찰에 둘러싸여 현장 검증을 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친정 올케가 "지금 방송 봤어요? 고모부(남편) 같은데?"라고 물었다. 겨우 "글쎄, 모르겠어"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날부터 어린 딸을 안고 사흘간 피해자의 집을 찾아갔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피해자의 노모가 살고 있던 아파트를 찾아가 '식모로 10년이고 20년이고 부모처럼 모시겠다'는 심정으로 울며 빌었다. 굳게 닫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웃 주민들이 흘낏거렸다. 피해자의 아들이 "살인자 만나면 밟아 죽여버리겠다"고 하며 돌아다닌다는 말이 있었지만 무서움도 느낄 수 없었다.
삶이 송두리째 뒤집혔지만 아무에게도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중학생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나쁜 사람과 싸우다가 실수로 크게 다치게 해서 조사를 받는다"고 말했다. 다니던 교회에도 나갈 수 없었고 십수 년 연락해온 동창들도 만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말이 헛나가 소문이 퍼질까 두려웠다. 전셋집을 처분하고 다른 동네에 월세 임대아파트를 얻었다.
10년이 흘렀다. 초등학생이 된 딸은 아직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내 실수로 사람을 크게 다치게 했다고 알고 있다. 아들은 힘든 형편에 결국 대학을 그만두고 대형마트 경비 일을 하며 어머니를 돕는다. 하지만 커 가며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더 이상 면회를 함께 가지 않는다. "나마저 이 사람을 떠나버리면 감옥에서 혼자 자살할 것 같았다"는 은희 씨만 아직도 매달 한 장씩 남편에게 편지를 부치고 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