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형벌, 흉악범의 가족]<上> “피해자는 더 할텐데…” 말 못하는 고통의 나날아버지의 ‘자책’
사형수의 아버지 정환수(가명) 씨가 아들의 사진을 꺼내어 보고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1996년. 재판장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지자 수의(囚衣)를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직폭력배 정현민(가명·당시 30) 씨가 몸을 떨었다. 청부 폭력 사실을 폭로하려는 동료 조직원 임성민(가명·사망 당시 29) 씨와 그의 애인 박모 씨(사망 당시 28·여)를 불러내 살해한 뒤 시체를 암매장한 죄였다. 아버지 정환수(가명·당시 69)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천 번 떠올렸던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그려졌다.
1993년 여름, 막내아들 현민 씨가 집에 친구 3명을 데리고 왔다. 당시 아들과 친구였던 임 씨가 듬직해보였다. 환수 씨는 수박을 잘라 먹느라 정신이 없는 아들과 임 씨에게 "진정한 친구라면 살인도 덮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리가 중요하다'는 뜻의 평범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1년 뒤 아들은 성민 씨를 살해했다. 환수 씨는 자신의 말이 마치 예언처럼 실현된 뒤 평생 아들의 범행을 자책하며 살게 됐다.
사형이 확정됐을 당시 현민 씨에게는 한 살배기 아들 용환 군(가명)이 있었다. 현민 씨의 아내는 1년도 지나지 않아 집을 나갔다. 환수 씨는 아들을 사형수로 키운 것을 속죄라도 하는 것처럼 용환 군을 성심껏 키웠다. 용환 군이 심장 판막 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일도 쉰 채 간호에 몰두했다. 지금도 환수 씨의 거실에는 용환 군이 학교에서 받은 개근상장과 표창장이 잔뜩 걸려있다. 몇 해 전 용환 군은 현민 씨의 여동생 자녀로 호적을 바꾸고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진학했다. 2008년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환수 씨는 평생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집에 혼자 남겨졌다.
환수 씨는 성민 씨의 가족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사형수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조성애 모니카 수녀가 환수 씨의 소식을 듣고 성민 씨의 아버지를 대신 만난 적은 있다. 성민 씨의 아버지는 현민 씨의 사형 판결 소식을 듣고 "걔 죽으면 안 되는데…. 살아야 하는데…"라고만 했다고 한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