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공연… 골목길따라 ‘예술의 향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은 원래 방직공장으로 유명했다. 동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1980년대 방림방적공장 모습(왼쪽 사진). 1960년대부터는 철공소 단지로 명성을 얻었고, 최근에는 예술창작촌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광객들이 문래동 예술투어를 하는 모습(오른쪽). 서울 영등포구 제공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 단지는 1960년대 초 무렵 경인로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에는 서울 철강산업과 기계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중반 청계천에 있던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문래동으로 이전하면서 한때 소규모 공장이 1000곳을 넘었다. ‘문래동에서는 10명만 모이면 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고, 시흥 김포 검단 시화 등 수도권 주변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철공소가 문을 닫고 임대료가 내려가자 그 틈새를 홍대, 대학로 등에서 젊은 예술인들이 알음알음 옮겨와 메우기 시작했다. 2003년 문래예술창작촌이 형성돼 현재 150여 곳의 작업 공간에서 250여 명의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회화, 설치, 조각, 디자인, 일러스트, 사진, 영상, 서예, 영화, 패션, 애니메이션 등의 시각예술 장르를 비롯해 춤, 연극, 마임, 거리 퍼포먼스, 전통예술, 음악 등의 공연예술가와 비평, 문화기획, 시나리오,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 활동가들이 작업하고 있다. 공장 단지에 예술이 흘러들면서 미국 뉴욕 브루클린이나 베이징 다산쯔(大山子) 798특구에 비견되기도 한다.
지금은 철공소와 예술로 유명하지만 문래동은 원래 방직과 인연이 많은 곳. 1930년대 방직공장이 대거 들어서면서 ‘실 사(絲)’자를 넣어 사옥정(絲屋町)이라 불렸다. 광복 후 우리식 이름으로 고칠 때 실을 자아내는 ‘물레’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소리가 비슷한 ‘문래(文來)’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 때부터 공장근로자가 많았던 이 지역에 일제는 최초의 계획도시인 ‘영단주택단지’를 짓기도 했다. 현재도 문래동4가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일명 ‘오백채’라고 불린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