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형벌, 흉악범의 가족]<下>피해자-유족이 보는 가해자 가족유영철 용서한 70대 “흉악범 가족 불행의 고리 끊어야”
황산 테러 피해자 박정아(가명) 씨가 25일 새로 찾은 직장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그는 평소에도 손에 남은 화상 흔적을 가리기 위해 손등이 덮이는 긴 셔츠를 입는다고 한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2009년 옛 직장 대표로부터 얼굴, 목 등에 전치 12주의 3도 화상 황산 테러를 당한 박정아(가명·30·여) 씨는 수차례 치료 덕에 온몸의 화상을 상당 부분 지워냈다. 하지만 25일 새 직장에서 기자와 만난 박 씨는 “가해자 이모 씨(31·수감 중)와 그 가족이 내 마음에 화인(火印)처럼 새긴 상처는 평생 지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 직후 이 씨 동료의 가족들이 박 씨가 입원한 병실로 찾아왔다. 그 동료는 테러 공범으로 지목된 상태였다. 뜻밖의 방문이었다. 가족들은 박 씨와 몇 마디 나누다가 “합의해 달라”는 용건을 꺼냈다. 가해자 동생이 건넨 편지에는 “우리 형이 검찰까지 가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이들이 “감형에는 피해자의 합의가 결정적”이라는 경찰의 조언을 받고 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박 씨는 화가 치밀었다. 박 씨는 “흉악범의 부모라면 자식을 잘못 키운 것에 대해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감형과 관계없이 먼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씨 가족은 박 씨를 사건 이후 한 차례도 찾지 않았다.
고 씨는 기자에게 “흉악범의 가족을 돕는 이유가 오히려 유영철 사건 이후 생명의 소중함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흉악범이 출소 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흉악범을 가족으로 뒀다는 이유로 다른 가족이 불행을 겪는 악순환이 반복되면 또 다른 강력범죄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영철의 아들을 돌보고 싶다는 고 씨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른 피해자 가족들이 유영철 아들의 주소 등을 알면 보복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이유로 유영철의 국선변호인이 공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흉악범의 가족에 대한 지원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려면 피해자 지원을 먼저 확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2011년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이 시행돼 연간 600억∼700억 원이 피해자 구조금으로 배정되지만 이 중 70%가량은 성범죄 피해자에게 쓰인다. 이용우 한국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은 “매년 강력범죄가 30만 건가량 발생하지만 지원을 받는 피해자는 6600여 명에 불과하다”며 피해자 지원 확충을 촉구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