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1959∼)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낮은 햇살, 겨울이 오면 배달해주게
지난여름에 다 못 쓴 편지, 우연한 사건들과
몇몇의 사람, 오 겨울이 오면
내게 말해주게 사람과 사람이
어긋난 흔적, 몸부림 따위들, 오래
예정된 결말의 느릿느릿한 진행에
끝끝내 겨울이 오면 그 황황한 뒷모습
서둘러 부려놓는 필연의 짐짝에
헐겁게 흔들리는 약속들과 다만 몇몇의 사람
어떤 일도 체념하기 위하여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운명의 낮은 햇살.
시집 ‘세월의 거지’에서 옮겼다. 정과리는 해설을 이렇게 시작한다. ‘뜨거운 정념의 나이는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여전히’라는 말이 가슴을 아릿하게 한다. ‘세월의 거지’가 출간된 게 25년 전 이맘때다. 서른을 갓 넘겼으면서 세상 다 산 듯 ‘여전히’라니, 과민한 염치다. 25년 만에 다시 시집을 읽으며 시편들의 빼어남에 놀랐고, 처음 읽었을 때는 내가 몰라봤던 것에 놀랐다. 그리고 김갑수가 시집 출간 이후 왜 시를 안 쓰는지 알 것 같았다. 젊은 나이에 생의 어둠을, 그 끝을 봐버린 거다. 시집 전편에 자학, 자기조롱, 체념과 환멸이 드리워져 있다. 그는 너무 어둠을 봐버려서 정신을 차린 거다. 성정이 ‘질풍노도’인 사람이 정신 차리고 물정을 깨치면 어찌 시를 쓰겠는가. ‘우리들 꿈의 거지 환멸의 거지’(시 ‘세월의 거지’에서)는 더 할 말도 없고 더이상 이렇게 살기 싫은 거다. 화르르 불태우고 일찍이 손 턴 랭보처럼.
봄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다.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숨었다 나타나고 다시 숨고 나타나고, 숨바꼭질을 하다 나타나는 봄. 반대로 겨울을 기다리는 사람은 적다. 글쎄, 스키 타러 갈 생각이 간절한 사람은 기다릴 테지. 겨울을 좋아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경제적, 심정적으로 여유만만한 사람이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겨울은 온다. 그처럼 시린, 예정된 결말이 있다. 시에서 ‘어긋남’과 ‘몸부림’은 어떤 연애의 처절한 양상을 보여준다. ‘끝끝내 겨울이 온다면’, 그래도 낮은 햇살은 비치겠지. 운명의 한계를 알고 체념하는 화자다. 하루하루 마음 시린 젊은 날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그렸다. 시의 행간과 배면에 비치는 겨울 빙판의 낮은 햇살이여.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