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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허진석]타클로반에서 빛났던 태극기

입력 | 2013-11-27 03:00:00


허진석 국제부 차장

태풍 하이옌이 정면으로 덮치는 바람에 쓰레기장처럼 변한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을 15일 공군 수송기 C-130을 타고 빠져나왔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과 각종 동물의 사체가 섭씨 30도의 날씨에 역한 냄새를 풍기던 피해 현장을 나흘 만에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그때 수송기의 동체와 조종사의 복장에 있던 태극마크는 눈부셨다.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안도감과 ‘어려운 나라를 돕는 한국’이라는 자랑스러움이 동시에 밀려 왔다.

태풍 피해 발생 이틀 만인 10일 필리핀 세부에 한국 신문기자 중 가장 일찍 도착해 17일 일요일 새벽 귀국하기까지 고생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필리핀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확인된 사망자만 5200명이 넘고 이재민도 40만 명을 넘어섰으니 그 처참함은 말과 글로 다 옮기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타클로반 공항은 안전한 곳으로 빨리 피신할 수 있는 탈출구였다. 11일 오후부터 필리핀항공이 76인승의 특별기를 운항하기 시작했지만 군 수송기를 타려는 사람들의 줄은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 민항기의 비행기 삯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번 태풍으로 가옥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해안에 나무로 된 집을 짓고 살던 빈민 계층이었다. 이들은 비가 오면 비를 맞아 가며 3, 4일간 노숙을 한 채 기다리기도 했다.

공항에서 미국인은 비교적 여유롭게 타클로반 공항을 빠져나갔다. 수많은 미군 비행기가 오갔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14일 오후 첫 착륙 예정이던 한국 공군 수송기는 공항 정체로 착륙하지 못하고 결국 회항했다. 이 때문에 우리 교민들은 현지에 파견된 필리핀 한국대사관 황성운 참사가 주선한 미군 수송기를 타고 밤늦게 겨우 마닐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15일 한국 공군의 수송기가 도착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이날 상공을 선회하던 비행기를 카메라의 망원렌즈로 포착해 태극마크가 있는 것을 확인한 기자단과 교민들 사이에선 절로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구호물품을 다 내린 수송기에 교민과 봉사단원, 기자 등 30여 명이 올랐다. 타고 보니 수송기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C-130은 동체 크기에 따라 78명, 혹은 114명까지 탈 수 있다. 그제야 땡볕의 공항에서 탈 차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필리핀 사람들을 뒤로하고 수송기에 오른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국 공군 수송기는 물론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날 이후 세부와 타클로반을 오가며 구호물품과 필리핀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러나 재난 현장에선 한 시간이 촉박하다. 한국 공군기가 도착한 첫날부터 빈자리에 필리핀 사람들을 태웠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인도주의에 입각한 이런 구호 활동엔 국력에 걸맞게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심하게 돕는 게 필요하다.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더 빛나 보일 수 있도록.

허진석 국제부 차장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