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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오원철]불혹의 대덕특구, 또 다른 시작

입력 | 2013-11-29 03:00:00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4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필자의 귓전에 맴도는 소리가 있다. “수도 하나 놓지 못하고, 도로도 내지 못하면서, 연구소를 언제 짓는다 말인가? 청와대가 직접 대덕단지 건설을 맡아라!”

1976년 대덕을 방문해 연구단지 건설 진척사항에 대한 브리핑을 듣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필자와 대덕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들어 공업화가 급격히 진전되었다. 수출 100억 달러,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을 육성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박 전 대통령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과 함께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학기술 발전이 우선돼야 했다.

당시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비롯해 몇몇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용지가 좁고 연구 분야도 점차 확대되면서 새로운 연구단지 건설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973년 5월 28일 대덕연구단지(대덕특구) 건설계획안이 국가계획사업으로 확정되었다. 대덕특구의 밑그림이 그려진 데는 누가 뭐라 해도 당시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의 공이 컸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연구단지 건설에 대한 대통령의 최종 재가가 떨어진 지 3년이 지나서도 연구단지 건설은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대규모 단지이다 보니 우선 용지 확보부터 쉽지 않았고, 예산 집행이 어려워 도로나 수도 등의 기간시설 건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침내 1976년 3월 박 전 대통령이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현장을 시찰하는 자리에서 대대적인 개편을 지시했다. 주관 부서도 과학기술처에서 중화학공업기획단으로 이관되면서 산업기지개발법이라는 법적 토대 위에서 용지 매입과 도로, 수도, 전기 등 인프라 조성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이후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지원이 있었기에 성공적으로 연구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 허허벌판이었던 대덕에 대규모 연구단지를 만들 수 있었던 동력을 필자에게 묻는다면 첫 번째로 정부의 강한 ‘추진력’을 꼽을 것이다. 무엇보다 최고 결정권자였던 박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의지와 집념이 대덕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조성된 대덕특구가 불혹을 맞이했다. 지금의 대덕특구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땀과 노고가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최근에는 해외에서도 대덕특구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다니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40년 전 황무지 갈대밭을 과학기술의 메카로 만든 추진력과 열정 그리고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지키던 과학자들의 자부심과 주인의식을 되새기며 대덕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심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