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한강 지음/165쪽·8000원/문학과지성사
사물의 윤곽이 흐릿하고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진 시간. 시인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근원적인 상실과 슬픔, 영혼의 균열에 대해 노래했다.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중)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피 흐르는 눈 4’ 중). 그의 소설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상적 삶에 안착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주인공들의 독백으로 읽히는 시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삶을 체념하거나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부서지고도”(‘피 흐르는 눈 3’ 중) 살아 있음을, 고통과 대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시인이 20대 때 주로 쓴 것으로 보이는 시집의 5부(캄캄한 불빛의 집)에 수록된 시들이 특히 그렇다. “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나는 귀를 막았지만/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막을 수 있는 노래가/아니었다”(‘유월’ 중)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