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공주’가 오바마 킹메이커로… 이젠 홀로서기 도전
세계 중장년층이 즐겨 부르는 닐 다이아몬드의 명곡 ‘스위트 캐럴라인(Sweet Caroline)’의 한 소절이다. 1969년 다이아몬드의 이 앨범은 200만 장 이상 팔리며 무명의 그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었다. 대중은 노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다이아몬드는 굳게 함구해 왔다.
38년 후인 2007년 11월 다이아몬드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가 주인공”이라며 “소녀 캐럴라인이 조랑말 ‘마카로니’ 옆에 있는 사진을 보고 그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에 반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50세 생일을 맞은 캐럴라인을 위해 위성 중계로 이 노래를 불러 주는 깜짝 이벤트도 연출했다. 미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왕족 아닌 왕족’ 캐럴라인 케네디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백악관 뜰에서 조랑말 ‘마카로니’를 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캐럴라인이 미국 정계로 들어간 건 2008년. 시카고의 무명 정치인 버락 오바마를 미 민주당 대선 후보와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뒤 정계의 문을 두드렸다. 5년 후 오바마는 그를 최초의 여성 주일대사로 지명했다. 대통령급 환대를 받으며 일본에 온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리는 관심은 ‘세계 최고 권력자의 귀여운 딸’이던 유년 시절 못지않다.
일본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고 있는 캐럴라인이 일본의 집단적자위권을 지지하고 나서 한국은 그의 행보에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게 됐다.
아버지에게 ‘자상한 가장’ 이미지 부여한 공신
담요를 덮은 어린 캐럴라인이 아버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어깨에 기대어 쉬고 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로 케네디가의 비운이 시작됐다. 암살 당시 임신 중이던 그의 모친 재클린은 둘째 아들 패트릭을 조산했다. 아기는 사흘 만에 숨졌다. 5년 후에는 역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캐럴라인의 삼촌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됐다. 남편과 시동생의 연이은 암살로 재클린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재클린은 시동생이 죽은 지 4개월 후인 1968년 10월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재혼해 그리스로 이주했다. 이는 그가 ‘영원한 대통령 부인’으로 남아 주길 바랐던 미국인들에게 실망을 줬다. 하지만 재클린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7년 후 또 과부가 된 재클린은 두 자녀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1986년 막내 삼촌 에드워드 케네디의 손을 잡고 입장한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캐럴라인은 1986년 전시 기획자이자 부유한 유대인의 아들 에드윈 아서 슐로스버그와 결혼했다. 그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보조 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만난 둘은 예술 애호가라는 공통점을 계기로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장의 캐럴라인이 막내 삼촌 에드워드 케네디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모습은 미국인에게 부친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캐럴라인은 세 자녀를 출산했다. 그는 부친의 이름을 딴 도서관의 이사장을 맡고 부모에 대한 추억을 술회한 책도 여러 권 펴냈지만 기본적으로 주부의 삶을 살았다. 남편의 성 대신 케네디라는 이름을 고수한 것만이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불행이 또 다가왔다. 1994년 어머니가 오랜 암 투병 끝에 숨졌고 5년 후 갓 결혼한 남동생 존 F 케네디 주니어도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겨졌다.
지금까지 케네디가에서는 대통령 1명, 장관 1명, 상·하원 의원 6명, 대사 2명이 나왔다. 캐럴라인이 2009년 막내 삼촌 에드워드 케네디의 사망 이후 정계 명맥이 끊긴 케네디가의 부활을 주도할지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오바마를 ‘검은 케네디’로 만들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선거 유세에 동행한 캐럴라인.
하지만 캐럴라인은 2008년 1월 27일 미 유력지 뉴욕타임스(NYT) 기고를 통해 ‘아버지와 닮은 대통령감을 드디어 발견했다’며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다. 그는 ‘앵글로색슨 백인 신교도(WASP)’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최초의 아일랜드계이자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던 부친과 흑인인 오바마가 소수파, 개혁의 아이콘, 능수능란한 화술 등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NYT 기고의 배경에는 형이 숨진 후 캐럴라인을 친딸처럼 보살펴 왔던 막내 삼촌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도 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그는 2009년 사망 전까지 캐럴라인의 정계 데뷔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뛰었다.
케네디가의 지지를 등에 업은 오바마는 자신을 ‘검은 케네디’로 포장했다. 그는 2008년 2월 22개 주의 경선이 동시에 실시된 ‘슈퍼 화요일’에 승기를 잡았다. 결국 강적 힐러리를 물리치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뽑혔다. 오바마도 보은(報恩)을 서둘렀다.
대선 과정에서 캐럴라인을 부통령 후보로 고려하기도 했던 오바마는 당선 후에는 캐럴라인에게 그의 조부이자 케네디 전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프 케네디가 지냈던 주영 대사를 맡기려는 구상까지 했다. 주영 대사는 ‘미국 외교관의 별’로 불리는 최고 보직이다.
캐럴라인은 2008년 말 힐러리 클린턴의 국무장관 입각으로 공석이 된 뉴욕 주 상원의원에 도전했다. 민주당 수뇌부는 물론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까지 캐럴라인의 상원 도전을 지지해 정계 데뷔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NYT 등 주요 언론과 릴레이 인터뷰를 가진 그는 심각한 자질 부족 비판에 직면했다. ‘있잖아요(you know)’, ‘음(um)’, ‘어(uh)’와 같은 말을 남발한 언어 습관이 치명타였다.
그는 AP와의 인터뷰에서 2분 27초라는 짧은 기간에 ‘you know’를 무려 30차례 사용했고 출마 이유와 활동 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횡설수설하며 간결하면서도 논리적인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정치 아마추어’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그 와중에 최대 4억 달러(약 4200억 원)로 알려진 그와 남편의 재산 의혹까지 불거지자 캐럴라인은 상원 의원 도전을 포기했다.
일본의 ‘캐럴라인 열풍’
2013년 11월 주일 미국대사로 부임한 직후 아키히토 일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워싱턴 정가는 그의 주일 대사 발탁을 철저한 정치적 계산으로 본다. 연방정부 폐쇄, 오바마 케어 논란으로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는 오바마가 케네디 전 대통령의 사망 50주년을 계기로 전 세계에서 불고 있는 ‘JFK 열풍’에 편승하기 위해 캐럴라인을 낙점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달 12일 그의 일본 부임 사흘 전 워싱턴 일본대사관에서 열린 축하 파티는 대선 후보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상하원 의원 수십 명이 참석했고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파티를 주최하다시피 했다. 세계 언론의 취재 경쟁도 뜨거웠다.
일본의 환대는 극진했다. 캐럴라인은 도착 나흘 만인 이달 19일 일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했고 하루 뒤 아베 신조 총리와 면담했다. 타국 대사는 부임 후 신임장 제정에만 최소 한 달이 걸리고 총리와의 단독 면담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신임장 제정을 위해 왕궁으로 갈 때 왕실이 제공한 마차를 탔다. 도로에 운집한 일본인들은 그를 보며 미국 성조기를 흔들고 박수를 쳤다. 그가 미국 대통령보다 더한 환대를 받았다는 말도 나온다.
캐럴라인도 화답했다. 그는 서양인에게 낯선 다도(茶道)를 체험하고 붓글씨로 ‘벗 우(友)’자를 써 보였다. 어디선가 연습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한다”는 말까지 했다. 직업 외교관 뺨치는 언행으로 비쳐졌다. 커트 캠벨 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대사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대통령과 바로 전화할 수 있느냐다. 그보다 이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세습 정치에 익숙하고 유명인 대사를 선호하는 일본인의 성향, 무명의 오바마를 알아본 정치 명문가 후예의 남다른 유전인자 또한 그의 향후 행보에 관심을 더한다.
문제는 그의 부임이 한국에 미칠 영향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날로 미일 동맹이 강화되고 있지만 한일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하다. 이 와중에 미 대통령급 지명도를 지닌 주일 미국 대사가 위안부, 독도 등 첨예한 한일 이슈에서 “일본을 지지한다”고 언급하고 그 목소리가 미 정계 곳곳으로 뻗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엔 그야말로 악몽이 될 수 있다. 케네디 대사에게 환호하는 일본 내 분위기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