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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허승호]빨간 내복의 추억

입력 | 2013-11-30 03:00:00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젊은이 300여 명이 빨간 내복을 입고 깜짝 등장했다. 이들은 ‘2014 인천아시아경기’ 주제가에 맞춰 1시간 동안 군무(群舞)를 추며 땀을 흘렸다. 인천대회를 저(低)탄소 친환경 행사로 치르자는 취지로 서울종합예술학교 학생들이 펼친 플래시몹이었다. 1960년대 고가 선물에서 한때 촌스러운 이미지로 격하됐던 내복이 최근에는 에너지 절약, 친환경, 지구 사랑의 상징으로 신분을 회복했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내복은 인기를 잃었다. 그걸 입으면 겉옷 바지의 무릎이 튀어나와 옷맵시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난방이 여의치 않던 시절 ‘궁핍의 기억’도 가세했을 게다. 하지만 요즘은 극세사 원단을 사용해 스타킹만큼 얇게 만든 내복도 많다. 한 여성속옷업체는 양팔과 쇄골 부분을 시스루(비쳐 보이는) 레이스로 처리한 섹시 스타일 내복을 출시하기도 했다.

▷내복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은 아웃도어업계다. 내복은 보온 흡습 속건(速乾) 효과가 뛰어나 등산 스키 스노보드 등 운동량이 많은 겨울스포츠 마니아들에게 필수품이다. 착용감이 좋도록 봉제선을 줄인 심리스(솔기 없는) 내의가 인기라 한다. 겨울용품의 매출은 기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영하 1∼5도에서는 머플러, 그 이하로 내려가면 다운패딩, 영하 10도에서는 장갑, 15도까지 떨어지면 내복의 매출이 급증한다고 한다. 작년 겨울엔 일반 국민의 70% 이상이 내복을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달랐다. 날씨와 상관없이 취업 철에 내복 매출이 가장 많았다. 취업 후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드리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붉은색이 따뜻해 보이기도 하고, 예로부터 부와 건강을 상징했던 때문으로 추정된다. 비록 내복 한 벌에 불과하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자립과 효심을 의미하고,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을 제대로 기른 데 대한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그 빨간 내복을 받아본 부모라면 촌스럽던 그때의 내복이 요즘의 고기능성 내복보다 훨씬 따뜻했음도 기억하시리라.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