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가정폭력 시달리다 남편 살해한 아내

입력 | 2013-12-04 03:00:00

당신이 판사라면 정당방위 인정하겠습니까
유사사건 21건중 정당방위 인정 ‘0’… 살인죄로 평균 4년2개월 징역선고
일각 “법정신 살려 폭넓게 인정을”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지난달 1일 서울북부지법 ○호 법정. 남편 박모 씨(54)를 노끈으로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윤진희(가명·48·여) 씨 변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변호인은 “윤 씨의 행동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저지른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형법상 정당방위는 “법익을 부당하게 침해당했을 때 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는 규정이다. 사건을 수사한 검경 및 윤 씨 측 주장과 공소장을 토대로 윤 씨가 법정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했다.

○ “살인 말고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첫 폭행의 기억은 25년 전 신혼여행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씨는 고속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다른 승객들로부터 항의를 받자 차에서 내려 윤 씨를 구타하며 분풀이했다. 자기편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윤 씨는 배 속 첫째 딸을 생각해 경찰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의 폭행은 둘째 딸(17)이 태어난 뒤에도 이어졌다.

첫째 딸(25)은 초등학생 시절 서울 노원구의 가내 작업장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스패너로 내리치던 장면을 기억한다. 윤 씨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티셔츠를 적실 정도였지만 박 씨가 “신고하면 심부름센터에 청부해 친정 식구를 전부 죽이고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누구도 경찰에 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발 이혼하라”는 딸들의 호소도 소용없었다. 윤 씨는 이즈음 폭행으로 왼쪽 귀의 청력을 잃고 코뼈가 부러진 뒤 우울증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올해 9월 윤 씨가 둘째 딸의 학원비를 대기 위해 전세를 월세로 돌린 사실이 발각되면서 남편의 폭행은 더욱 심해졌다. 윤 씨에게 화학약품을 먹이려 하고 노끈과 손으로 목을 조르는 등 예전과는 폭력의 강도가 달랐다. 처음으로 경찰에 도움을 청해봤지만 “방금 폭행이 일어난 게 아니라 입건할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9월 9일 박 씨는 윤 씨에게 망치를 보이며 “일 끝나면 (망치로 두개골을 깬 뒤) 머릿속을 들여다보자”며 위협했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라고 생각한 윤 씨는 작업을 하던 남편의 뒤로 노끈을 들고 다가갔다.

○ 정당방위 인정 1건도 없어

윤 씨의 재판을 지원하는 ‘한국여성의전화’는 1991년부터 지난해까지 가정폭력을 상담해온 여성 가운데 남편을 살해한 여성 21명의 확정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여성의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가 단 1건도 없었다고 3일 밝혔다. 분석 내용에 따르면 해당 여성들에게 재판부는 △부당한 폭행을 당하는 시점에서 한 행동이 아니고 △부당한 공격을 막기 위한 행위가 방위 수준을 넘었다는 이유로 전원 살인죄를 확정해 평균 징역 4년 2개월을 선고했다.

일각에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속에서 범행한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강우 충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당방위의 법정신은 부당한 공격에 맞서 법질서를 수호하는 것이므로 엄격한 법적 중립성보다는 당사자가 당한 피해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윤 씨의 남편 살해는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 사건은 3일 현재 2차 변론까지 진행된 상태로 2, 3개월 후 판결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서동일 기자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