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1971∼ )
계절을 잊은 눈비가
땀구멍마다 들어찬다
몸 안에 잠자던 운석이 눈을 뜬다
목탁 구멍 같은 뼈마디 사이로
이승이 밀려 나간다
구름들의 뒤 통로에
짓다 만 집 한 채 스스로 불탄다
마지막 입술이 한참동안 떨린다
나부끼는 재(災)
누군가 텅 빈 문을 열고
타다 남은 햇살을 주워 담는다
뜻 없이 불러본 이름들이 마음보다 길게 늘어서
지나온 이승에서 즐겁게 눈물겹다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된다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어느덧 새 이름을 얻는다
계절이 빠르게 바뀐다
숨을 쉬니 한 세상이 저만치
다른 상처에 다 닿았다
실제 일몰(日沒) 풍경과 거기 제 생의 일몰을 겹쳐 보는 마음이 아프게 그려진 시다. 지구의 시간은 우주의 억겁 시간 속에서 티끌처럼 미미하다. 하물며 인간의 시간은 우주가 눈 한번 깜박이는 것. 종종 우리가 눈 깜짝할 새 세월이 가버린 것처럼 느끼는 건 제대로 느끼는 거다. 눈비 몇 번 내리고 계절 바뀌고 세월이 술술 새어 한 생이 끝나는데, 우리의 평소 생의 감각은 다행히도 느른하게, 그 짧은 시간을 알뜰히도 핥으며 지나오도록 만들어져 있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