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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독서人]“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스무살의 당찬 인생론

입력 | 2013-12-07 03:00:00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비평서 ‘리좀…’ 낸 김해완




“제대로 글 쓰고 싶어 고교 중퇴하고 공부 시작했죠 글쓰기란 삶을 만드는 과정” ―‘중졸 백수’ 김해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망)을 쓴 김해완 저자는 처음부터 사람을 연신 놀라게 했다. 고등학교 중퇴의 중졸 백수가 인문비평서를 썼다는 것부터 감이 오질 않았다. 게다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설명서라니. 4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뒤엔 더 입이 쩍 벌어졌다. 1993년생 스무 살. 생일이 며칠 남았다니 굳이 따지면 아직 열아홉 살인 앳된 여성이었다.

“솔직히 아쉬움이 커요. 더 편하게 풀어야 했는데, 글이 울퉁불퉁해요. 아직 여물지 못한 탓입니다. 같은 또래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담았는데, 너무 어렵게 썼어요.”

뜨끔했다. 동년배는 둘째 치고 마흔 넘은 기자도 읽다 머리를 싸맸다. 공력이 약해 글이 난해해졌다? 노장 학자에게서나 듣던 말을 ‘애’한테 들을 줄이야. 게다가 이 조숙한 말투는 대체 뭔가.

“중3 시절에 잠깐 블로그를 운영했어요. 사춘기였던지 인간관계 고민을 자주 올렸죠. 그런데 엇비슷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요. 쓰는 어휘도 한정됐고…. 뭔가를 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대로 글 쓰고 싶단 욕망이 공부에 집중하는 원동력이 됐어요.”

하지만 그가 선택한 공부는 남과 달랐다. “또 다른 구속이 존재하는” 대안학교를 고교 1학년에 때려치우고, 2008년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 들어갔다. 지금은 그 모임에서 분화된 ‘남산강학원’ 연구원으로 있다. “대입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할 만큼 정신없이 읽고 쓰고 토론했다.

‘리좀…’은 그 치열했던 5년에 하나의 방점을 찍는 작업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충격과 지침을 줬던 책이 ‘천개의 고원’이었으니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을 ‘도구로 써 달라’고 당부했다. 저자는 그 인문학적 개념을 사용해 삶과 세상과 조우하는 길을 찾고 싶었다.

“10대는 누구나 미래를 걱정합니다. 하지만 ‘천개의 고원’은 말하죠. 자신을 표피로 규정짓지도 말고, 일상의 심층을 깨달으라고. 뭣보다 ‘살기는 쓰기’라고 일러줘요. 쓰기란 자신이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제게 이 책은 어렴풋한 불안을 잠재우고 한 발짝 내딛는 힘을 주는 매개체였습니다.”

읽는 즐거움에 푹 빠진 어린 학자에게 추천도서를 물어본 건 실수였다.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는 짱짱한 명제로 자기 주체를 변환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줬단다. 니체와 루쉰의 글들은 자기비하나 연민에 빠지지 않게 도와줬고, 사마천의 ‘사기’는 시대와 인간을 어떻게 조망하는지를 알려줬다. 프랑스 역사학자 에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의 중세 미시사 ‘몽타이유’와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계종말전쟁’도 끝내준단다. 좀 쉬운 책은 없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어떤가요? 끝자락에 나오는 뫼르소의 일갈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었죠.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는 이것밖에 없다.’ 실존의 고민은 다른 이의 판단이나 기준이 내 삶을 보장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죠. 인간은 고정된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 자체니까….”

졌다. 기자도 읽긴 했는데, 같은 책 맞나. 살짝 머쓱해졌다. 일단 ‘리좀…’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은 어디로 나아갈까.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다만 청년학도여, 너무 속도는 내지 말길. 서두르면 빨리 지치니.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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