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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鄕公의 세계

입력 | 2013-12-07 03:00:00


지방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대다수 지방공무원들은 선거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현실적으로 연(緣)과 줄, ‘연줄’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선거 시기엔 왠지 불안하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진은 6일 낮 광주시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청사 밖으로 나가는 모습.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 “부시장, 외부 행사 참석 좀 자제하세요!”(이광준 시장) “아니, 좀 다니면 어때서요!”(전주수 부시장)

지난달 강원 춘천시장 집무실에서 열린 주요 간부회의 도중 이광준 시장과 전주수 부시장이 외부 행사 참석을 놓고 목소리를 높였다. 둘은 춘천고 동기. 그러나 공식석상에서 부시장이 시장에게 항명한 건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깐깐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이 시장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다. “발언 수위가 아슬아슬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며칠 뒤 전 부시장이 사과했지만 직원들은 ‘지자체장 레임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재선의 이 시장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도지사에 출마하기로 결정한 상태. 전 부시장이 외부 행사에 많이 참석하는 건 이 시장이 떠나는 춘천시장에 도전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춘천시의 한 사무관은 “아무리 임기 말이고 각각 선거에 나선다지만 지역에서 수십 년 얼굴을 맞대고 지내 온 선후배 공무원들이 보기에는 당황스러운 장면이었다”고 전했다.

#2. ‘어떤 이는 단체장 임기 동안 가족을 포함해 세 번 진급하고, 어떤 이는 3선 하는 동안 한 번도 진급하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 아무런 기대가 없는 가운데, 오직 하나 2014년 7월이 빨리 왔으면…. 그날이 오면 지나간 12년 설움을 안주삼아 가슴의 응어리를 한 점 남김없이 토해 내련다.’

영남권의 한 3선 단체장 지역 공무원노조 홈페이지에 떠 있는 글의 일부다. 정실인사에 대한 비판과 ‘줄’을 잡지 못해 승진에서 배제됐다는 불만이 담겨 있다.

노조 홈페이지에는 직업 공무원의 한계를 절감하는 자조적인 글들도 올라 있다. ‘머슴들아 주는 대로 먹고, 모가지 처박고 열심히 일이나 해라. 인사는 단체장 고유권한이다.’ ‘인사에 불평하지 마소. 그렇게 해도 대꾸 하나 못하는 현실이지 않소. 그렇다면 순종해야지.’

고향이나 연고지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지방공무원, 자기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향토 공무원이라 해서 이른바 ‘향공(鄕公)’으로도 불린다. 4년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는 그들에게 희비쌍곡선과 다름없다. 후보들과는 또 다른 ‘무대 뒤의 전쟁’을 치르기 때문이다. 이 향공들의 ‘희로애락’을 들여다봤다. 》  

▼ “晝現夜次… 지방선거후 살생부 돌텐데 보험 들어야” ▼

요즘 관가 주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내년 지방선거 출마예정자들이 출정식을 겸해 ‘실탄’(선거자금)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한다. 지방공무원들은 인정과 의리를 무시하지 못해, 무엇보다 훗날을 생각해 손에 봉투를 들고 행사장을 찾아 출마예정자에게 눈도장을 찍는다. 해운대구 제공

공무원들은 공직선거법 제9조 ‘공무원의 중립 의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혼자 이를 지키기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대박은 아니더라도 쪽박을 차서는 안 된다’는 주변 분위기가 팽배해 있어서다.

낮엔 현직 단체장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해가 넘어가면 차기 유력 후보에게 보험을 드는 행태는 향공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다. 소위 ‘주현야차(晝現夜次)’다. 본인이 움직이기 힘들 때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까지 끼워 넣는다.

충청권 3선 단체장 지역의 6급 공무원 박모 씨(52)는 “내년 6월 지방선거 이후 나돌 ‘살생부(殺生簿)’를 생각하면 현역과 후보군 사이에서 눈치 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특정 후보에 대한 줄서기는 선거가 가까워지면 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각 지역 공무원노조는 “어려운 시기일수록 공무원들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향공의 줄서기뿐 아니라 단체장 임기 후반기에 나타나는 지역 관가의 레임덕 현상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단체장이 이미 3선으로 연임 제한에 묶여 동일한 선거에 다시 나서지 못하거나 불출마를 선언한 곳에서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더 심각하다. 이를 막아낼 뾰족한 대책을 찾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처음 치러지는 내년 6월 4일 제6회 지방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지역 관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야 대격돌의 틈바구니, 후보 간 피를 튀기는 전장에서 촉수(觸手)를 곤두세워야 하는 지방 공무원들. 그들은 오늘도 현실과 법규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한 번 찍히면 10년 간다, “줄을 서시오”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업무에 매진해야 할 공무원들이 차기 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특정인을 따라다녀서야 되겠느냐.”

7월 초 전남 목포시청 대회의실. 정종득 시장은 ‘공무원들의 줄서기’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3선인 정 시장은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차기 시장 후보에게 일찌감치 줄을 서서 인사상 혜택을 누리려는 공무원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국의 상당수 지방자치단체에서 줄서기 풍토는 여전하다. 현행법상 차기 선거 출마가 금지돼 있는 3선 단체장이 있는 지역에서는 3선 취임 직후부터 차기 유력 후보에게 눈길을 주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 정 시장은 “공무원이 선거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그동안 몇 차례 했지만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며 “차기 시장 후보를 돕는 공무원에 대해서는 인사조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공무원 줄서기는 직급을 가리지 않는다. 울산시청에 근무하는 6급 A 씨(55)는 새누리당 차기 울산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B 씨에게 일찌감치 줄을 선 케이스. 3선인 박맹우 시장 재임 기간에 사무관 승진에서 계속 탈락하자 차기를 기대하며 시장 후보를 돕고 있다는 거였다. A 씨는 B 씨 사조직의 실무책임자를 맡아 퇴근 후는 물론이고 업무시간에도 선거 관련 사안을 챙길 정도라는 소문이 나돈다.

퇴임을 앞둔 공무원들의 줄서기는 더 노골적이다. 당선이 유력한 차기 단체장에게 확실하게 줄을 서서 지방 공기업 사장(이사장) 등 임원 자리를 꿰차기 위한 것. 지방 공기업 책임자가 되면 연봉 1억 원 안팎에 임기가 보장되고 연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울산시 산하 6개 공기업과 각 구(군)의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은 모두 정년퇴직한 공무원이 맡고 있다.

줄을 잘못 섰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전남 C시에 근무하는 6급 D 씨(53)는 3년 전 시장 선거에서 엉뚱한 줄을 잡았다가 승진에서 미끄러지는 쓴맛을 봤다. 현 시장과 전직 시장 간의 대결에서 전직 시장 편에 섰던 그는 2년 전 5급 사무관 승진 심사 과정에서 2배수에 들었지만 결국 탈락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늦게 6급으로 승진한 직원 3명은 보란 듯이 사무관으로 승진해 두 명은 과장 보직을 받았고 한 명은 면장으로 나갔다.

D 씨는 “솔직히 (내가) 밀었던 시장이 떨어졌을 때 승진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으로 생각했다”며 “읍면동을 합쳐 공무원이 900명이 넘지만 선거가 끝나면 누가 누구를 밀었는지 금방 안다. 이 때문에 4년간 승진은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선거에서 떨어진 시장이 내년 선거에 나온다면 다시 줄을 설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눈치는 보이지만 이미 ‘○○○는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힌 마당에 그를 도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는 “사무관 한번 달아보려고 줄을 서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며 “공무원에게 ‘영혼’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게 가슴 아프다”고 했다.

선거가 치열한 자치단체에서는 낙선한 상대 후보와 학연, 지연, 혈연이 겹치는 공무원은 선거에서 이긴 단체장과 그의 측근들에 의해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본인은 “중립을 지켰다”고 주장해도 “당신은 상대 후보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살생부가 돌아다닌다. ‘살부’에 이름이 오르면 그 단체장 임기 동안 승진이나 요직은 엄두도 낼 수 없다. 2, 3급 고위 공무원 가운데는 현 시장과 맞선 후보와 인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기간 한직을 전전하다 퇴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치단체장의 3연임을 2연임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향공들의 줄서기는 은밀하게 진행된다. 공천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 있는 데다 섣불리 특정인에게 ‘보험용’으로 줄을 섰다가 낙선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부산 모 구청의 6급 계장(53)은 요즘 고민이 많다. 정년 이전에 사무관(5급)으로 승진해야 하는데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할지 판단이 안 서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후보가 유리할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뚜렷한 주자가 없다. 주변에 수소문을 해봤지만 정답은 없었다.

예비 후보 쪽에서 공무원이나 기업인들을 줄 세우려는 풍토도 여전히 남아있다. 업무를 빙자해 접근한 후 은연중에 ‘조건’을 제시하며 협조를 강요하는 방식이다. 울산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E 씨는 “차기 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이 수시로 만나자고 연락을 해 머리가 아프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만나고는 있지만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울산대 정책대학원 김도희 교수(행정학)는 “단체장의 의중이 너무 많이 반영되는 현재의 자치단체 인사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공무원들의 줄서기는 선거 때마다 반복될 것”이라며 “독립적인 위원회 운영 등 시스템에 의한 인사가 이뤄지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항우장사(項羽壯士)도 못 막는 ‘레임덕’

대구 북구(구청장 이종화·3선)에서는 요즘 “단체장의 존재감이 없는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공직 기강이 흔들린다는 것. 대구 북부경찰서가 최근 부하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북구청 5급 간부 김모 씨를 불구속 입건하고 같은 여직원에게 수차례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성희롱한 혐의로 동장 이모 씨에 대해 즉결 심판을 청구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 씨는 올해 5월부터 최근까지 사무실과 회식자리 등에서 여직원 F 씨의 손을 잡거나 껴안는 등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씨는 F 씨에게 최근까지 상습적으로 음란 문자메시지를 보내 “만나자”고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일부 사실을 인정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구 북구의회의 한 의원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 3선 단체장의 임기 말에 승진과 무관한 일부 공무원들이 분위기를 흐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3선 자치단체장이 있는 지역의 공직 기강은 흔들리고 있다. 현직이 내년 지방선거에 나서지 않는 자치단체, 단체장의 장악력이 느슨한 곳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경남 사천시에서는 최근 시장 비서실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앞선 9월에는 사천시 공무원들이 근무시간에 도박을 하다 안전행정부의 암행감찰에 적발돼 지탄을 받았다. 그럼에도 정만규 사천시장은 내년 선거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경남 고성군에서는 최근 폐수 종말처리장 공사와 관련해 뇌물을 받은 공무원 2명이 구속됐다. 고성군 공무원노조는 “내부 비리는 부끄러운 일이다. 3선 군수가 측근 중심의 인사를 했고 이번 일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11월 말 열린 실국원장회의에서 “깨끗한 도정을 추진해 왔는데, 일선 시군에서 요즘 계속 사고가 발생해 마음이 무겁다. 연말에 공직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감사관실에 당부했다. 홍 지사는 지난해 취임 때부터 공직사회 비리 척결을 천명한 뒤 감찰활동을 계속 벌여 왔지만 공무원 비리는 계속 불거졌다.  

▼“줄 잘못 섰다… 밀었던 시장후보가 낙선, 소문 다 났다… 4년간 승진-요직 꿈 접어”▼

부산 해운대구(구청장 배덕광)는 올봄 시 종합감사에서 선심성 행정, 특혜성 수의계약 등이 드러나 직원 180명이 무더기로 징계 및 주의를 받았다. 사안의 경중을 떠나 전체 직원의 15%가 관련됐다는 사실에서 ‘3선 단체장의 레임덕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배덕광 구청장은 지역모임이나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서병수 국회의원이 부산시장에 출마할 경우 지역구를 물려받을 생각이다. 공천이 안 되면 무소속으로라도 선거에 나가겠다”고 말하고 다닌다. “단체장이 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을 자초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운대구 감사에서는 인사 문제도 드러났다. 규정을 무시한 계약직 채용으로 인해 전체 인사의 공정성마저 도마에 올랐다. 해운대구의 시설물 사용 및 공사 계약도 잦은 특혜 시비를 불렀다. 해운대구 의원은 “아무리 임기 말 현상이라지만 행정 편의주의가 도를 넘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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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전남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은 “2008∼2012년 징계를 받은 전남도 공무원이 1048명에 달한다. 이는 서울시의 30% 수준이며 2010년과 2011년에는 서울시보다 더 많았다”고 질타했다. 3선째인 박준영 전남지사는 최근 직원 정례조회에서 공무원 부패와 관련해 “이웃, 친구, 가족까지 손가락질할 수 있다”며 “도청에 온 사람들이 건물 잘 지어 놨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도둑놈 소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박 지사의 발언에 대해 공직 내부에서는 “임기 만료를 앞두고 흐트러진 공직 분위기를 다잡기 위한 포석이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레임덕 방지를 위해 선수(先手)를 쳤다는 얘기다.

강정훈 manman@donga.com·정승호·지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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