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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호의 경제 프리즘]‘쌀 관세화’ 더 미룰 일 아니다

입력 | 2013-12-10 03:00:00


허승호 논설위원

산업통상자원부 우태희 통상교섭실장은 지난달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의사를 밝히는 자리에서 기자들과 이런 문답을 주고받았다.

문: TPP에서는 무조건적인 ‘쌀 관세화’가 원칙이다. 쌀 시장 개방에 영향은 없나.

답: “쌀 시장 양허(讓許) 제외는 정부의 기본입장이다. 변함없다. 구체적인 조건은 예비협상을 통해 더 파악하겠다.”

쌀 관세화를 거부하는 듯한 이 답변에는 문제가 있다.

관세화. 시장을 열되 수입 가격을 국내 가격 수준으로 끌어올릴 만큼의 고율관세(관세상당치)를 매겨 충격을 완화한다는 뜻의 통상용어다. 쌀 시장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에서 ‘10년간 관세화 예외’를 인정받았다. 놀라운 협상 성과였다. 10년 후인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릴 때 농민운동가 이경해 씨가 ‘쌀 관세화 유예’를 외치며 자신의 가슴을 찔러 숨졌다. 정부도 이를 관철해냈다. ‘비관세화’가 20년간 지속되고 있는 배경이다.

하지만 2008년 통상전문가들이 “이제 조기 관세화하는 게 쌀 농가에 유리하다”는 분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국제 쌀값이 올라 국산 쌀의 경쟁력이 커지면서 생긴 일이다. 관세화를 유예할 경우 그 대가로 최소시장접근(MMA) 물량을 저율관세로 수입해야 한다. 그리고 매년 이 물량은 일정 비율로 늘어난다. 반면 관세화할 경우 관세상당치가 충분히 높아 수입이 더 늘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조기 관세화 주장의 요체다.

농림부도 공감하고 정책 전환을 위한 공청회를 준비했다. 그러나 경제논리는 무력했다. 정치색 짙은 농민단체가 단상을 점거한 것이다. 어영부영 4∼5년이 흘렀고, MMA 수입물량도 매년 확대됐으며, 관세화 전환 무산으로 인한 쌀 농민의 손실도 훨씬 커졌다.

앞서 일본은 1999년에, 대만은 2003년에 우리와 같은 이유로 조기 관세화했다. 하지만 한국은 “관세화는 쌀 전면개방을 위한 수순”이라는 소박한 반대 논리에 꽉 막혀 있다. ‘관세화 반대를 카드로 삼아 정부의 농업 지원을 더 확보하겠다’는 속내로도 읽힌다. 사인(私人) 간 ‘밀당’이라면 모르겠지만 공적(公的) 단체가 취할 전략이 아니다.

사실 TPP가 언제 타결될지, 쌀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알 수 없다. 급한 것은 ‘한국에 대한 비관세화 인정’이 내년 말로 끝나는 WTO다. 한국은 2015년 이후의 계획을 내년 9월까지 WTO에 통보해야 한다. 우리가 3번씩이나 관세화를 유예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비관세화를 유지하겠다”면 WTO의 웨이버 조항(예외적인 상황에서의 의무면제) 적용을 요구할 수 있는데, 정말 큰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다른 산업이 아니라 쌀 농민이 해야 하는 양보다. 필리핀은 지난달 쌀 관세화 웨이버를 요청하면서 쌀 의무수입 물량을 2.3배로 늘리는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수출국들로부터 매정하게 거절당한 상태다.

대개의 통상협상이 그렇듯 정부는 쌀 협상을 두 갈래로 진행해야 한다. 대외 교섭과 대내 설득이다. WTO에서 우리는 “관세화하되 1986∼88년 기준으로 계산한 (높은) 관세상당치를 매기겠다”고 주장할 수 있다. 유리한 전장(戰場)이다. 걱정되는 곳은 논리가 제대로 힘을 못 쓰는 대내 부문이다.

우 실장은 합리적인 관료다. TPP 참여 발표 자리가 쌀 시장 개방 논란으로 비화할까봐 답변을 얼버무렸을 것이다. 그러나 ‘관세화 거부’로 전달된다면 곤란하다. 미리 올바른 답변을 준비했어야 옳다.

“정부의 기본입장은 쌀 농가 보호다. 국내외 시장 변화에 맞춰 가장 유리한 방안을 관철하겠다”라고.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