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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박선희]부끄러움 없는 ‘코리아구스’

입력 | 2013-12-10 03:00:00


박선희 소비자경제부 기자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승민은 첫사랑 서연을 만나러 갈 때면 늘 애지중지하는 ‘게스’ 티셔츠를 입고 나간다. 하지만 그는 이 옷 때문에 서연이 보는 앞에서 연적(戀敵)이자 잘나가는 강남 선배 재욱의 놀림을 받게 된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게스(GUESS)’가 아니라 철자가 하나 뒤바뀐 ‘짝퉁 게스(GEUSS)’였기 때문이다. 짝퉁 게스로 인한 굴욕은 강북 출신 승민의 열등감이 폭발하는 도화선이 된다. 첫사랑을 뺏기게 생긴 볼품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감은 철자가 뒤바뀐 한심한 짝퉁 브랜드 이미지와 중첩된다.

시대에 따라 많은 이들이 욕망하는 브랜드는 존재했지만 모두가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잘스포츠와 이스트팍, 나이스나 아디도스, 심지어 아놀드 파라솔에 이르기까지 짝퉁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로고나 브랜드명을 바꾼 짝퉁은 짝퉁 중에서도 가장 하급 짝퉁이자 노골적인 희화화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짝퉁 로고는 욕망의 현실적 제약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쓰는 구차한 편법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짝퉁 로고를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감추고 싶던 욕망과 허세, 초라한 현실을 한꺼번에 들켜버린 듯한 자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좀 특이한 짝퉁 바람이 불고 있다. 로고까지 그대로 베꼈는데도 불티나게 팔린다는 ‘코리아구스’ 열풍(▶본보 3일자 A13면 참조… 캐나다구스 vs 코리아구스 )이다.

코리아구스는 외투 한 벌에 100만 원을 호가하는 인기 수입 브랜드 ‘캐나다구스’를 베낀 한국 모조품들을 부르는 말이다. 최근 해외 고가 패딩이 품절사태를 빚을 만큼 인기를 끌자 여기에 편승한 짝퉁들이 대거 등장한 것. 그런데 로고까지 흉내 낸 제품들이 주로 재래시장에서나 팔리는 싸구려가 대부분이었던 데 반해 코리아구스는 백화점에 입점한 중견 패션 업체들이 내놓고 있다는 점이 색다르다. 북극해를 형상화한 도안을 쓴 원제품 로고에서 도안만 독도, 영국 등으로 바꾼 걸 보면 ‘아놀드 파라솔’식의 유치한 짝퉁인데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짝퉁 기업이란 비난 속에서도 해당 업체들이 “소비자가 찾으니 내놓는다”며 당당한 이유기도 하다.

코리아구스 인기는 짝퉁을 통해서라도 선망의 대상을 갖겠다는 허영심의 발로일까 아니면 싸고 품질이 좋다면 개의치 않겠다는 합리적(?) 소비심리 때문일까. 그보다는 코리아구스 자체가 또 다른 유행이 되고 있어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연예인도 코리아구스를 협찬 받아 버젓이 입고 나온다. 알 만한 회사들이 뛰어들어 물량공세를 벌이는 코리아구스는 ‘찌질한 짝퉁’이 아니라 어느새 연예인도 걸치는 ‘쿨한 짝퉁’이 된 것이다. 유행이라면 아무리 고가라도 불티가 나듯, 역시 유행이면 짝퉁도 슬쩍 용인된다. 게다가 값도 싸니 일석이조. 고가 패딩 인기든 코리아구스 현상이든 양태는 달라도 본질은 같다.

우리는 또 한번 ‘유행이란 이유’로 자의식과 분별력을 잠시 놔버린 것 아닐까. 짝퉁 게스에 대한 부끄러움이 새삼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시대다.

박선희 소비자경제부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