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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 40년 인맥 2만명 숙청 도미노… 사상최악 피바람 불듯

입력 | 2013-12-10 03:00:00

[北 장성택 숙청]
張의 사람들 운명은…




장성택의 마지막 정치국 확대회의 북한 노동신문은 9일 전날 열린 당 정치국 확대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게재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 체포됐다. 사진 출처 노동신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숙청 발표는 북한에 다가올 핏빛 연말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다. 장 부위원장이 중앙당에 입성해 40년간 다져온 인맥을 고려할 때 숙청 규모는 사상 최대인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내부에서는 장 부위원장의 숙청을 김경희가 주도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극악한 역적으로 규정

장 부위원장의 죄명인 ‘반당반혁명종파분자’는 북한 체제에서 ‘역적’ ‘역모’에 해당하는 것으로 친족은 8촌까지 멸족하는 최고의 중범죄다. 장 부위원장에 대해 ‘반국가적 반인민적 범죄행위’ ‘부화타락’ ‘부정부패’ 등 각종 엄중한 사유들도 추가로 나열됐다. 북한이 특정 인물을 이 정도로 매도하고, 체포 장면까지 공개한 전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장 부위원장은 정치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역적 중의 극악한 역적’으로 매도돼 사라진 것이다.

북한 발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장성택 일당’이란 단어가 7차례, ‘장성택과 그 추종자’들이란 단어가 각각 2차례 등장한 점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장성택 라인을 모두 숙청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장 부위원장이 최고의 ‘역적’으로 규정된 이상 그의 라인은 역적을 추종한 무리로 매도돼 대부분 숙청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장 부위원장은 김일성 일가 외에 북한에서 자기 라인을 유지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됐던 유일한 인물이다. 김정일도 이를 어느 정도 용인했다. 측근 그룹은 2004년 장 부위원장이 2년간 실각했을 때 함께 좌천됐지만 이후 복귀한 장 부위원장은 이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된 장 부위원장의 자기 사람 챙기기는 더욱 노골화됐다. 최근 급부상한 북한의 50, 60대 신진 간부그룹의 상당수가 장 부위원장 라인으로 분류된다. 대표적 인물은 이영수 노동당 근로단체부위원장, 문경덕 평양시당 책임비서, 최부일 인민보안부위원장, 노두철 내각 부총리, 이종무 체육상, 오금철 인민군 부총참모장 등이다.

○ 숙청 범위 최소 수만 명 될 듯

북한에서 특정 인물을 숙청할 때는 일가친척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연관된 인물들이 모두 숙청 리스트에 오른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했을 때 황 전 비서와 연루돼 숙청된 인물은 2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학자로 살아온 황 전 비서와 권력의 중심부에서 의도적으로 측근을 챙겼던 장 부위원장의 위상을 비교해 본다면 이번 숙청 대상자는 2만 명이 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의 숙청 방식은 피라미드식으로 이뤄진다. 이번 경우 장 부위원장과 가까웠거나 그의 라인으로 승진한 인물을 숙청한 뒤 다시 그 사람과 가까웠던 사람을 조사해 또 숙청하는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숙청작업을 벌이면 대상자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더구나 북한은 반당반혁명종파 사건의 경우 일가족까지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거나 깊은 산골로 추방하기 때문에 숙청 대상자는 셀 수 없이 늘어날 수 있다.

○ 장성택의 아내 김경희 어떻게 되나?

장 부위원장에게 씌워진 죄명으로 볼 때 아내인 김경희 노동당 비서도 원칙적으론 숙청 대상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김경희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고모이자 김씨 혈통의 어른이어서 함부로 숙청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장 부위원장과 이혼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김경희가 장 부위원장 숙청 과정에서 조카의 손을 들어줬을 가능성이 높아 이번 기회를 통해 오히려 김경희의 위상이 높아질 수도 있다. 김경희는 1972년 장 부위원장과 결혼했지만 정상적인 결혼생활은 6년 정도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장 부위원장이 젊은 여성들과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김경희는 오빠인 김정일에게 부탁해 남편을 제철소 노동자로 혁명화 교육을 보낸 뒤 2년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의 부부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북한은 과거 숙청을 벌일 때에도 여성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다. 남편이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에 끌려가도 아내를 이혼시켜 친정으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기도 했다. 자녀의 경우 수용소에는 아들만 함께 끌고 갔고, 결혼한 형제 중 여자 형제는 출가외인으로 간주해 연대 처벌을 하지는 않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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