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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조지형 교수의 역사에세이]인류 역사상 최초의 황제는 사르곤

입력 | 2013-12-11 03:00:00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국가를 통일해 아카드 제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황제라고 불렀다. 그림은 사르곤의 손자인 나람신의 정복 이야기를 보여주는 비석.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황제로 추정되는 청동 두상. 이라크의 니네베에서 출토됐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황제는 누구일까요? 황제라는 용어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연원합니다. 중국의 역사서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사냥법과 불을 가르친 복희, 농경을 가르친 신농, 집과 옷을 만들고 수레를 발명하며 글자를 도입하고 천문과 역산을 시작한 헌원이 삼황입니다. 이들의 아들이 오제입니다. 역사적인 인물은 아니고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황제라는 용어는 아시아에서는 진의 시황제 영정(嬴政)에서, 지중해 세계에서는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제나 아우구스투스가 역사상 최초의 황제는 아닙니다.

기원전 2350년경에 아카드 제국을 세운 사르곤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단군이 아사달에 고조선을 세웠다는 단기(檀紀) 1년이 기원전 2333년이니까 단군보다 더 오래전의 인물입니다. 사르곤은 수메르는 물론이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산재해 있던 많은 도시국가를 정복하고 총독을 파견하여 지배했습니다. 이전에 도시국가를 통치했던 독립 군주라는 뜻을 지닌 ‘엔시’는 사르곤 시대에 와서 총독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사르곤은 자신을 정당한 왕 혹은 진정한 왕이라는 뜻의 ‘샤루-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왕 중의 왕, 즉 황제를 의미했습니다.

황제라는 용어는 제국을 지배하는 권력자의 가장 높은 존칭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실질적으로 황제 아닌 권력자가 자신을 황제라 부른 경우도 있고 실제로 황제이지만 왕이라는 명칭을 고수한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 중심주의적 사고 때문에 실제로는 제국이지만 마치 변방의 족속처럼 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흉노족이나 스키타이족은 항상 떠돌이 민족은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대제국을 형성했습니다. 사르곤은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황제 였던 셈입니다.

사르곤은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을 두었다고 추정됩니다. 약 5000명의 군인이 ‘그와 식탁을 같이했다’고 전해집니다. 식탁을 같이했다는 말은 함께 동고동락을 했다는 뜻이라기보다 정복 전쟁의 결과로 얻은 약탈품과 이익을 사르곤으로부터 하사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르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석권하여 남쪽으로는 걸프 만에 도달합니다. 북쪽으로는 오늘날의 터키 인근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으로까지 제국의 영역을 넓혔고 56년간 황제의 자리에서 군림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항상 신비로운 이야기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신비로운 이야기는 다른 영웅의 이야기로 둔갑하여 반복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점토판에 새겨진 이야기는 이렀습니다.

‘사르곤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며 어머니는 여사제였습니다. 사르곤을 몰래 낳은 어머니는 갈대 바구니에 사르곤을 담아 유프라테스 강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강에서 물을 긷던 어떤 사람이 사르곤을 우루크의 여신 인안나와 동일시된 여신 이시타르의 정원사로 길렀습니다. 사르곤은 생성과 풍요의 여신이자 용맹한 군신(軍神)인 이시타르의 사랑을 받아 양육되었으며 키시라는 도시국가의 왕 우르자바바의 총애를 받아 술잔을 드리는 시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신들이 분노하여 왕권을 우르자바바에게서 빼앗아 사르곤에게 주었습니다.’

강에 떠내려 보냈지만 신의 보호를 받은 아이가 무사히 구출되어 강건하게 훈육되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구약성경의 모세는 나일 강에서 구출되고,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테베르 강에서 신의 보호를 받습니다. 사르곤의 탄생신화는 이집트의 호루스 탄생신화와도 유사합니다. 이시스는 남편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의 위협을 피해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호루스를 몰래 출산하여 광주리에 담아 강에 떠내려 보냅니다. 사르곤의 시대는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시대입니다.

그러나 사르곤은 분명히 역사적 인물입니다. 사르곤은 키시에서 북쪽에 위치한 아카드라는 도시를 제국의 통치 중심지로 정했습니다. 수메르 지역을 넘어 북쪽으로 제국의 팽창을 도모한 겁니다. 아카드는 남쪽의 수메르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카드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기에 제국에서 아카드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또 동일한 연호의 사용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연호는 경제, 군사 원정, 도시 건축, 제의(祭儀) 문서에 주로 사용되는데 오늘날에까지 우리는 사르곤의 연호 사용으로 아카드 제국에서 발생한 사건의 발생 시기를 명확하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르곤은 사상적으로도 제국의 통일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인 엔헤두안나를 달(月)의 신 난나의 대제사장에 임명했습니다. 사르곤의 딸은 수메르의 문화적 중심지인 우르에서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신에 바치는 찬송시를 읊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막대한 신전 재산과 다양한 종교를 이끌었습니다. 이후 5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사르곤의 사례는 우르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자신의 딸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 선례가 됩니다. 사르곤이 다양한 분야에서 후대 왕의 모범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라오와 달리 사르곤 자신은 신(神)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의하면 사르곤의 아버지는 정원사였습니다. 사르곤이 비천한 신분 혹은 평민 출신이라는 애기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는 사르곤이 신의 아들임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사르곤의 손자인 나람신은 사르곤의 ‘세계의 왕’이라는 존칭을 넘어서 우주를 지배하는 왕이라는 뜻을 가진 ‘(우주의) 네 모서리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신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나람신은 아카드 제국을 더욱 넓히고 통치를 용이하도록 도량형의 통일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업적도 역사상 최초의 황제 사르곤이 없었다면 이룩할 수 없었습니다.

조지형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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