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7>허정무 축구협회 부회장
○ 한국 월드컵의 살아 있는 역사
한국 월드컵 대표팀은 1986년 멕시코부터 내년 대회까지 8회 연속 출전한다. “월드컵과 진짜 인연이 많다”는 말처럼 허 부회장은 8회 연속 월드컵 현장에서 동고동락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는 선수였다. 1985년 본보 11월 4일자 1면에는 태극마크가 선명한 유니폼을 입고 환호하는 그의 사진이 실렸다. 당시 그는 8만 명 가까이 들어찬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렸다. 이 한 방으로 한국은 1954년 이후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1986년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허 부회장이 마라도나를 막았던 건 여전히 화제다. 이른바 ‘태권 축구’였다. “마라도나와의 비교는 어불성설입니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었죠. 타임지에 내가 마라도나를 걷어차는 사진이 실렸는데 축구공은 뺐더군요. 그때 옐로카드도 안 받았는데….”
“아무리 이론에 밝은 지도자라고 해도 현장 감각은 필수예요. 파란만장했던 월드컵 역사의 중앙에 있었다는 건 행운이었죠.”
허 부회장은 “예전에는 돌파력, 헤딩력 등 한 가지 특기를 갖춘 선수가 많았다. 요즘은 체격과 환경은 나아졌어도 개인기, 창의력, 기본기가 나빠졌다. 8회 연속 출전이라고 안주할 시기는 아니다.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박지성 이영표는 뭔가 달랐다
허 부회장은 오랜 세월 숱한 제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허 부회장은 성공 유전자를 지능, 소질(감각과 센스), 체질, 성격의 네 가지로 분석했다. 그가 말하는 체질은 체력과 다르다. “성장기 어린 선수들을 보면 체질을 통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알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회복 능력입니다. 그래야 좋은 체력이 나옵니다.”
허 부회장은 무명이던 박지성과 이영표를 일주일 동안 테스트한 뒤 올림픽 대표로 선발했다. “어떤 선수인지 파악하려고 부모님까지 만나봤어요. 둘 다 타고난 체질을 지녔더군요. 물론 성실하고요. 주위에선 뭐라 했지만 그만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봤어요.” 그는 또 “앞선 3가지를 갖췄어도 게으르거나 소극적인 선수는 크게 될 수 없다. 부지런하고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작 허 부회장은 어땠을까. “회복력만큼은 손기정 선생과 비교할 만할걸요. 심박수가 1분에 46∼47회 정도로 느려요. 좀처럼 지칠 줄 몰랐죠. 중학교 졸업하고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는데도 큰 힘이 됐죠.”
○ 부드러워진 진도개
그러면서 그는 “진도개처럼 한길만 갔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털어놓았다. “내 성격이 원체 고집이 강해 타협은 몰랐어요. 2000년 중반부터 달라졌어요. 지인들의 권유도 있었고요. ‘배려’ ‘마시멜로 이야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같은 책을 통해 느낀 점도 많았어요.”
잡기에 능한 허 부회장은 아마추어 바둑 5단에 당구는 공인 300. 한 지인은 “정무 형님은 지고는 못 배긴다. 밤을 새워서라도 이겨야 자리를 떴다”고 귀띔했다. 축구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패배가 싫고 늘 강한 팀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컸어요. 지도 방법이 강하다는 평가가 늘 따라다녔죠.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죠.”
그랬던 그가 역지사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프로축구 전남 감독을 맡던 2006년과 2007년 2년 연속 FA컵 정상에 오른 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새로운 한국 축구 역사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변화 덕분이었다. “소통을 중시했습니다. 자율을 강조했고요. 늘 귀를 열어 두려고 애썼어요. 하루는 88세 노모께서 ‘너희 선수들은 왜 볼을 기다리느냐. 나가서 받으면 좋을 텐데’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나만 옳고 내가 최고라는 의식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는 “며칠 전 이영표와 식사했는데 감독님 10년 사이에 너무 달라지셨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욱’ 할 때가 있어요. 계속 노력해야죠”라며 웃었다.
6세인 쌍둥이 외손자를 둔 허 부회장은 꿈나무 육성에도 관심이 많다. 전남 목포시에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축구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내 꿈은 소박해요. 유명 선수, 지도자였다는 말보다는 존경할 만한 선배, 축구인으로 남고 싶어요. 축구를 통해 많은 걸 얻었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는 거 아닙니까.”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