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뜬다 → 시간적 휴지 공간적 여백, 18번 → 가장 뛰어난 장기
일본의 전통공연 가부키(歌舞伎)는 현대 한국인에겐 정말 낯선 장르다.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중엔 이 가부키에서 온 단어가 적지 않다.
영화나 방송 촬영 도중에 ‘마가 뜬다’는 말을 많이 쓴다. 대사와 대사 사이, 액션과 액션 사이에 틈이 길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가 낀다’는 표현과 혼용하기도 한다.
‘마가 낀다’의 마는 악마 마(魔)자로 ‘좋은 일 뒤엔 꼭 마가 낀다’는 식으로 쓰는 말이다. 반면 ‘마가 뜬다’의 마는 사이 간(間)자의 일본어 발음이다. 시간적 휴지나 공간적 여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무대표현 기교를 말한다.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면 ‘뜸’이 어울린다.
이는 전통 공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의 현대극 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의 연극을 보면 공연 도중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순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역시 ‘마의 미학’을 구현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데 반해 한국에선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문화적 변용이다.
요즘은 애창곡으로 대체된 ‘18번’이란 말도 주하치반(十八番)이란 가부키 용어에서 나왔다. 가부키 최고의 배우 중 하나였던 이치카와 단주로(市川단十郞) 집안 대대로 전승된 대표작 18편을 통칭하던 말이 ‘가장 뛰어난 장기’란 뜻을 거쳐 ‘가장 잘 부르는 노래’가 된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