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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난 사람]‘외국어와 연애하는 남자’ 번역가 김갑수씨

입력 | 2013-12-21 03:00:00

“영화보고 펜팔하다 어느새 8개 언어… 실습은 이태원서”




“외국어를 사랑해서 외국어와 연애하고 결혼했다”는 프리랜서 김갑수 씨. 김 씨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등 8개 언어를 구사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공부할 계획이다. “그냥 궁금하기 때문”이란다.17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갤러리카페에서 김 씨가 자신이 공부한 외국어 책들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나는 외국어와 연애하고 결혼했다"

프랑스 파리 지하철 12호선 아베쎄스(Abbesses) 역. 관광객 무리에 섞여 역을 빠져나온다. 금발 여성에게 다가가 묻는다. "엑스퀴제 무아. 켈 레 라 뤼 푸르 몽마르트르?(실례합니다. 몽마르뜨 언덕이 어느 방향이죠?)", "알레 뚜 드루와 세뜨 쁘띠뜨 뤼 아 고쉬. 부 베렐 르 기쉐 드 뗄레페리끄 에 부 지 예뜨(왼쪽 골목을 쭉 따라가면 케이블카 매표소가 나와요. 거기예요)." 갑자기 눈앞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일본 도쿄 신주쿠역. 내가 여기 왜 있지? 쇼핑하러 가는 중이었나? 행인에게 묻는다. "시츠레에 시마쓰. 찌카꾸노 데빠아또와 도꼬데쓰까?(실례합니다. 가까운 백화점이 어디인가요?)", "치까테츠노 에끼노 마에노 미치오 와타루또 아리마쓰(지하철 역 앞에서 길을 건너면 있습니다).",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쓰(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찰나 눈앞이 또 일렁인다.

러시아의 한 광장. 옆에 선 남자아이가 빤히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야 마구 빠모치?(도와드릴까요?)" 다행이다. "쓰빠시보. 야 이즈 까례이(고마워, 난 한국에서 왔어)." 관광객 안내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려는데. 안내소라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외웠는데. 머리를 쥐어뜯는 순간. 김갑수 씨(48)는 꿈에서 깬다.

라디오와 쉘부르의 우산

시작은 1975년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구식 라디오였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 주파수를 옮기자 지지직 거리면서 영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운이 좋으면 중국어, 일본어 방송도 나왔다. 뜻도 모른채 신기해서 들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제2외국어로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영어가 학교라면 독일어는 클래식 공연장 같은 느낌이었다. 독일 클래식 음악테이프를 '사재기' 했다. 독일가곡 악보를 사서 가사를 해석해 혼자 불렀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도.

영어, 독일어에 빠져있을 무렵 TV에서 우연히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프랑스 영화를 봤다.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로 부르는 '당신을 기다릴게요'가 흘러나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프랑스어는 어떤 언어일까? 다음날 서점에 달려가 초급 프랑스어 문법책을 샀다.

1984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 과목이었던 음성학은 수업 전부터 지루하다는 악평이 자자했다. 교수님은 음성과 소리를 잘게 쪼개는 법부터 가르쳤다. 알파벳 피(P)와 에프(F), 비(B)와 브이(V)가 어떻게 다른지, 입 안에서 혀를 어느 위치에 갖다 대야 하는지 느릿느릿 말했다. 강의실은 조용했다. 학생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속으로 '내가 찾던게 이거야!' 쾌재를 불렀던 김 씨만 빼고.

정확한 외국어 발음에 목 말랐던 김 씨에게 음성학은 단비였다. 혼자 공부했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발음을 다시 뜯어고쳤다. 3개 외국어가 익숙해지자 중국어 책을 샀다. 홍콩 액션배우 청룽(成龍·성룡) 때문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저 언어가 대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지' 늘 궁금했다. 마침 EBS 교육방송에 중국어 강좌가 있었다.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서 집에 있을 때 마다 틀어놓고 따라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2007년 친구 소개로 영어 펜팔을 시작했다. 상대방은 일본인 영어교사 이즈미(50·가명). 이즈미는 유럽에서 10년 간 살다와 영어에 능통했지만 문제는 그 친구들이었다. 2008년 일본에 놀러갔다가 만난 이즈미의 친구들은 한국어와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김 씨는 일본어를 몰랐다. 양쪽이 하고픈 말도 다 전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한국에 돌아온 김 씨는 일본어 회화책 한 권을 1년 걸려 통째로 외웠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병기된 소설을 사서 쭉쭉 소리내서 읽어나갔다. '아름다운 물건'이라고 말하고 이어 '기레이나 고또'라고 발음하는 그런 식이었다. 당시 한 출판사에서 일본 초등학교 1학년에서 5학년까지 국어교과서를 일한대역본으로 낸게 있었다. 구해서 지칠때 까지 읽었다.

2009년, 일본에서 이즈미와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민나 히사시부리. 겡끼닷따? 캉코꾸데 혼또오니 나츠까시깟따. 나니오 다베요오까? 고항오 다벳떼 나니오 시요오까?(모두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한국에서 정말 그리웠어. 뭐먹을까? 밥먹고 뭐할까?)" 김 씨가 쏟아내는 일본어에 일본인 친구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외국어와 연애하고 결혼했다

김 씨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에 능통하다.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러시아어와 아랍어는 최근 초급 문법과 회화책을 모두 뗐다. 한국어를 제외하고 8개 언어다. 초중고교 12년동안 영어를 배우고 매달 수십만원 씩 들여 영어학원에 다니는 직장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씨는 스스로를 "외국어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고 표현했다.

가장 묻고 싶었던 건 역시 '비결'이다. 영어 하나도 어려운데 8개 외국어를 어떻게 머릿 속에 넣었을까.

18세기 이탈리아의 추기경 주세페 메조판티(1774~1849)는 72개 언어를 구사했던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사전이나 문법책 없이도 처음 접하는 언어를 분석해서 공부했다. 예를 들어, 현지인에게 현지언어로 주기도문을 계속 외우게 했다. 이를 들으며 소리와 리듬을 파악했다. 그다음 말을 명사, 형용사, 동사 등 여러부분으로 쪼갰다. 이렇게 분석한 단어들로 전체 언어구조를 머릿 속에 그리며 새로운 문장을 조합했다.

김 씨는 "나는 그런 천재는 아니다"며 웃었다. "지금 러시아어를 공부하는데 그걸 예로 들어볼게요"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엔 읽기다. "우선 부담없는 초급 문법책을 하나 샀어요. 그림도 많고 글자도 큼직한 걸로. 기초 알파벳은 1, 2시간 쓰면서 들여다보면 대강 외워져요. 그 다음에는 하루에 한 장씩 읽어나갔어요. 물론 한글 발음도 함께 나와있는 책으로요. '책상 위에 연필과 꽃병이 있습니다'를 한글로 읽고 러시아어로도 읽고. 이런 식으로 책 한권을 5번 쯤 읽으면 대강 어떤 언어인지 감이와요."

그다음 암기에 들어간다. "기본 회화책을 샀어요. 쉬운 책으로. 하루에 3문장 씩 외워나갔어요. 우습게 보이지만 오늘 외워도 내일은 생각이 잘 안나곤 해서 쉽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1년을 하면 1000문장을 머릿 속에 넣고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상태가 돼요."

입이 근질거리면 이태원으로

"외국어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전부"라고 답했다. 요즘도 8개 외국어를 매일 공부한다. 영어를 20분 읽고, 그 다음은 중국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식이다. "토할 것처럼 힘들 때도 있다"는게 그의 표현이다.

'외국에 자주 다녔으니 그정도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해외체류 경험은 대학생 때 대만과 홍콩여행, 이즈미를 만나러 일본에 다녀온 것, 지인들과 미국과 튀니지를 다녀온게 전부다. 프랑스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지만 정작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꿈에서 파리를 볼 수가 있어요?", "파리 여행책을 워낙 많이 읽었거든요. 웬만한 지명 등은 줄줄 외울 정도라 꿈에서도 나타나요."

김 씨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산다. 혼자 프리랜서로 일하기 때문에 외국어를 쓸 일도 거의 없다. 한번은 버스에서 프랑스 출신 흑인여성을 만나 너무 반가워 집에 오는 내내 대화를 한 적도 있다.

입이 근질근질거릴 정도로 외국어를 하고 싶을 땐 이태원에 간다. 혼자도 가고 친구들을 데려가기도 한다.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호프에서 맥주를 한잔 하다 옆 자리 외국인에게 말을 건다. "익스큐즈미(실례합니다)."로 시작해서 프랑스인이면 프랑스어로, 이탈리아인아면 이탈리아어로 '언어 스위치'를 바꿔 시동을 건다. 술이 약간 취하면 외국어도 평소 실력의 1.5배 쯤 더 유창해진다.

아랍어와 러시아어 중급 단계에 들어섰다는 그에게 "또 배우고 싶은 외국어가 있냐"고 물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스어야 여행할 때 쓴다고 해도 라틴어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궁금해서 왜냐고 물었다. 그는 "웬지 배워야 할 것 같아서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자 맹자를 읽는 셈인데, 궁금하지 않아요?"

조기교육? 돈 낭비 시간 낭비

한국은 외국어, 특히 영어에 목숨걸다시피 한다. 조기유학은 물론이고, 혀 수술까지 한다는 뉴스도 있었다. 그는 "그럴필요 없는데. 저를 보세요"라고 말했다. "여러 나라를 가보고 체험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오직 외국어 때문이라면 돈과 시간낭비예요. 차라리 한국에서 저처럼 외국어를 습득하고 외국에 가면 더 많은걸 느끼고 얻을 수 있잖아요."

곧 50세를 바라보는 그는 통역과 번역을 한다. 최근에는 영어에서 유용한 표현을 모아 책도 썼다. 내년 2월 서점에 나올 예정이다. 한 가지 꿈이 더 있다. '외국어 연구소'를 만들어 그가 쌓은 노하우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것. "학원이 아니라 연구소"라는 것을 강조했다. "학원은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배우잖아요. 그게 아니라 지식을 공유하고 서로 발전시켜 나가고, 널리 전파하는 그런 연구소를 만들고 싶어요. 뜻이 맞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언제나 환영이예요."
노래를 좋아한다길래 독일 가곡 1개만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김 씨는 "무리데쓰(무리예요)"라며 수줍게 일본어로 거절했다. 그날 저녁, 그가 카카오톡을 보냈다. '아까 미안해서요. 대신 피아노 연주 한 곡 보낼게요." 그가 보낸 링크를 누르자 유튜브 영상이 나왔다. 김 씨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얼그레이가 담긴 잔을 들던 김 씨의 통통한 손가락이었다. 연주곡 제목은 고엽(Falling leaves). 아름다운 선율이 마음에 말을 거는 듯 했다. 세상에, 9번째 외국어군.

○ 김갑수 씨가 일러주는 외국어 학습 팁


1. 발음을 제대로 익히면 듣기는 저절로 해결된다.

문법과 독해는 어느정도 되는데 듣기가 안돼 고생하는 학습자가 부지기수. 외국어 공부를 시작할 때 자신의 발음을 최대한 원어민과 같게 만드는 노력을 하면 듣기는 따로 공부를 안 해도 저절로 된다.

2. 발음 때문에 외국 갈 필요는 없다.

사람은 10세 정도가 지나면 모국어가 체화되기 때문에 다른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기 어렵다. 특히 성인은 무작정 외국에 가서 외국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그 나라 언어를 똑같이 발음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에서 구강구조와 발음원리, 발음기호를 정확히 공부하면 머리로 이해한 뒤 발음을 제대로 낼 수 있다.

3. 외국어 조기교육은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

모국어도 제대로 익숙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외국어 학습을 위해 조기유학 보내면 뇌에서 간섭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뇌가 서로 헷갈려 혼동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한국어를 완전히 익힌 뒤 중·고등학교 때 외국에 나가서 배워도 늦지 않다.

4. 변별쌍과 조음점을 공부하라.


영어의 B와 V, P와 F 등은 다르게 발음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두 가지 발음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런 발음을 변별쌍이라고 한다. 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훈련을 하면 발음과 듣기가 좋아진다. 조음점은 소리를 낼 때 혀가 입 안에서 어느 위치에 닿는지 등을 말한다. 각 소리마다 조음점을 기억하면 도움된다.

5. 모국어 잘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잘한다.

성인은 모국어를 통해 외국어를 이해한다. 외국에서 태어나서 외국어 환경에서만 살아온게 아니라면 외국어를 공부하는데 모국어 실력은 필수다.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어에서도 좀 더 아름다운 표현, 다양한 표현, 고급 표현 등을 알고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실력의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다.

6. 영어에 표준발음은 없다.


영어에 한가지 통일된 표준발음은 없다. 영국인, 미국인, 아일랜드인의 발음이 모두 다르고, 미국에서도 뉴욕, 시카고, 텍사스 지방에 따라 발음은 천지차이다. 어학테이프에 나오는 발음을 똑같이 구사하지 않아도 된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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