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심지어 눈이 왔다. 아, 오늘 꼭 재활용 쓰레기 버려야 하는데. 첫눈이고 뭐고 나는 짜증부터 났다. 역시나 온몸에 힘을 준 채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오는데, 막 닫히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 “안녕하세요!” 추위에 발그레해진 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과, 아이 너머 거울로 보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인상을 쓰고 있는 내 얼굴이 묘한 대비를 이룬 엘리베이터 안. “저는 겨울이 너어어무 좋아요!” 나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아이의 살갑고 밝은 목소리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랄까. “왜냐하면요, 겨울엔 눈도 오고 방학도 있고 엄마가 이번 방학엔 꼭 스키장 데려가 주신다고 했거든요! 언니도 겨울 좋아하세요?” “….” 땡그란 눈이 연신 방글방글. “풉.”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그리고…, “네, 저도… 좋아해요…. 겨울.” 아이의 해맑고 따뜻한 그 웃음에 대고 나는 차마, “아니? 나는 싫거든? 겨울 저어엉말 싫거든?”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내 입으로 말했어. 좋아한다고, 겨울을…. 그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래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정말 겨울을 100% 완벽하게 싫어하는가? 겨울을 좋아할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어? 그런데… 제법 있었다, 겨울을 좋아할 만한 이유도. 포장마차의 따뜻한 어묵국물! 그거 겨울 아니면 그 맛 안 나지. 붕어빵, 호빵, 호떡, 팥죽, 그래 겨울 별미가 얼마나 많아? 그리고 무엇보다 만화책과 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귤 까먹으며 보는 만화책! 맞아, 만화책은 겨울이지.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만화책들 중엔 책장 귀퉁이가 노랗게 물든 것들도 꽤 된다. 갑자기 신이 났다. 나는 바로 만화 전문가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넣었다. “요즘 재밌는 만화책 뭐 있어?”
강세형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