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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英-獨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현장을 가다

입력 | 2013-12-21 03:00:00

“친환경이 돈 된다”… 英 전력社, 고객에 태양광 설치해줘




호흡의 질이 곧 삶의 질이다. 최근 중국발 스모그 재앙으로 우리 국민은 불편과 불안에 시달렸다. 중국의 산업 개발이 본격화된 1990대 초부터 예견된 사태였지만 20년 넘게 방치해 이제 와선 마땅히 손을 쓰기가 어렵게 됐다. 환경과 기후 문제는 중장기적 대비 없이 일단 문제가 닥치면 해결이 어려운 특성이 있다.

이번에 경험한 ‘회색 공포’가 이미 오래전 예고됐듯이 온실가스 위기도 머잖아 닥칠 현실이다. 2015년부터 국내에 도입되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는 그런 면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이다. 배출권 거래제는 기업이 국가에서 할당받은 배출량보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으면 그만큼 배출권을 사게 하고, 덜 배출하면 시장에 팔아 돈을 벌 수 있게 한 제도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거나 친환경 대체에너지 사용을 늘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취지다. 중국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5%를 홀로 쏟아내 우리에겐 지속적인 위험 요인이다. 동아일보는 2005년부터 배출권 거래제를 운영해 온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을 찾아 이 나라 기업들이 어떻게 변화에 대처하고 있는지 점검했다.


배출권 거래제로 바뀐 일상

런던 외곽에 사는 영국의 라디오 진행자 마크 구디어 씨(52)는 승용차 보닛에 꽂힌 전기 충전호스를 빼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마무리한다. 구디어 씨의 ‘애마’는 닛산의 전기차 리프. 그의 집 지붕에 있는 태양광 패널을 통해 전날 낮 동안 충전된 전기가 이 차의 연료다. 차를 충전하고 남는 전기는 다른 일상생활에 쓴다. 그가 리프를 몰고 런던 시내에 진입하면 혼잡통행료를 면제받는다. 하루 16파운드, 우리 돈으로 2만7000원꼴이다. 전기차는 시내 주차료도 무료다.

구디어 씨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의 수혜자다. 그의 집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회사는 영국 최대 전기회사인 브리티시가스(BG)다. 전기를 많이 팔수록 수익이 많을 텐데 이 회사는 전기 소비를 떨어뜨리는 태양광판을 앞장서 보급하고 있다. 태양광판 설치 후 25년간 품질을 보증하고 5년간 유지 보수를 책임진다. 이 회사가 고객들의 전기 소비를 줄이는 ‘역주행’을 감행하게 된 주요인이 바로 배출권 거래제다. 영국은 전력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원의 70%가 석탄과 천연가스다. 전력을 많이 생산할수록 온실가스 배출이 는다. 공장 가동을 다소 줄이면서 이를 만회할 대안으로 찾은 게 바로 태양광이다. 기존 고객을 자사의 태양광 고객으로 붙잡아 장기적으로 영국의 태양광 시장을 선점하려는 전략인 것이다.

구디어 씨가 전기차 리프를 타게 된 것도 배출권 거래제의 영향이 적지 않다. 지난해 닛산은 영국 선덜랜드 공장을 폐쇄하려던 당초 계획을 변경해 전기차 생산 기지로 전환했다. 영국과 유럽연합(EU)에 배출권 거래제 시행 후 각종 ‘이산화탄소 줄이기(저탄소)’ 대책이 쏟아지면서 유럽의 전기차 수요가 급속히 늘었다는 판단에서다. 노르웨이에선 올해 4월 판매된 차 중 리프가 두 번째로 많이 팔렸을 정도다. 닛산의 공장 잔류 결정으로 사라질 뻔했던 선덜랜드 공장의 일자리 2250개는 그대로 유지됐다. 배터리 공장이 생겨 500명이 새로 고용됐다.


英 기업들 “어차피 할 바엔 거래제가 낫다”

독일 본의 라인강에 있는 케네디 다리에 태양광판이 설치돼 있다. 태양광 전기로 다리 가로등의 불을 밝힌다. 주독일 한국대사관 본 분관 제공

영국 기업들은 “기후변화에 저탄소 경제로 잘 대응할 경우 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한상공회의소 격인 영국산업연맹(CBI)은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저탄소 산업은 연간 4%씩 성장했으며 배출권 거래제 시행 이후 일자리가 약 100만 개 창출됐다고 보고 있다. 세계적 석유회사 BP의 기후변화대응팀장 빌 톰슨은 “어차피 뭔가를 해야 한다면 탄소세 같은 직접 규제보다 시장 기능을 활용한 배출권 거래제가 유리하다”고 말했다.

BG는 도요타 등 기업 고객에게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을 공급하는 방식의 대응책을 선보였다. 도요타 더비 공장 인근에 태양광판 1만7000개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생산한 전력으로 공장을 가동하는 것이다. 연간 전기 사용량의 5%를 이런 방식으로 충당해 이산화탄소 2000t 저감 효과를 보고 있다. 이 사업에 든 210억 원은 BG와 도요타가 공동 부담했다. 도요타 역시 온실가스 저감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독일계 기업 지멘스는 영국 맨체스터에 신재생에너지공학센터를 설립해 해상풍력발전소 전력을 전송하는 고압전송 시스템을 개발했다. 배출권 거래제 시행 후 영국 기업들이 태양광과 풍력 등 대체에너지를 쓰려는 수요가 늘자 이를 기회 요인으로 본 것이다.

글로벌 정유업체인 셸은 네덜란드 로테르담 공장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화훼농업에 필요한 비료로 전환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공장에서 매년 발생하는 600만 t의 이산화탄소는 네덜란드 온실가스 전체 배출량의 3%를 차지한다. 이 중 매년 30만∼40만 t을 포집해 재활용한다. 독일은 신재생에너지 개발 투자 분야에서 전 세계의 13%를 차지하는 강국이다. 독일은 배출권 거래제 도입 후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꾸준히 투자한 결과 지난해 전체 에너지원 중 신재생에너지의 비율이 22%에 이른다.

민간 영역에서도 배출권 거래제 이후 저탄소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영국에선 학부모와 교사들이 돈을 모아 학교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태양광 학교’ 프로젝트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교내 전기를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하고 기존에 부담하던 전기료를 도서 구입 등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이다. 한겨울에도 전기료 부담 때문에 난방시설을 하루 1∼2시간만 가동하는 우리나라 중고교에서 참고할 만한 사례다. 영국은 이케아 킹피셔 등 가구나 건축 자재 전문 매장에 태양광 패널이 구비돼 있어 고객들이 장을 보다 손쉽게 구입할 정도로 자연 에너지 활용이 일상화돼 있다.

독일은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라인 강변에 설치된 대형 교각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해 다리 가로등 전기로 활용한다. 2011년 4월 본에 있는 케네디 다리에 처음 설치된 이후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고 있다.


한 줌의 햇볕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유럽의 기업들 사이에서도 배출권 거래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여파로 20∼30유로(이산화탄소 t당) 선에서 거래되는 배출권 가격이 5유로 수준(7000원)으로 급락했다. 배출권 거래를 염두에 두고 공격적 투자에 나선 기업들로선 기대했던 이익을 거두기 어렵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올해 거래제 시행 3기에 접어들면서 기업별 배출권 할당량이 상당 부분 줄어 시장가격이 다시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의 배출권 거래 관련 민관협의체인 ETG의 존 크레이븐 의장은 “아직까지 거래제 때문에 다른 나라로 공장을 옮긴 사례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산업 구조 특성상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은 중화학공업 비중이 크고 무역 의존도가 높아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포스코 환경에너지기획실 정용식 팀장은 “EU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는 상당 부분 생산량 감소에 따른 것이어서 국내 제조업의 성장잠재력을 해치지 않도록 보완해야 한다. 배출권 할당 등 정책이 투명하고 일관돼야 기업들의 신규 투자가 위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반론도 많다. 김지석 주한 영국대사관 선임기후변화담당관은 “최근 영국과 독일의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매년 1.5∼2배 급증하고 있다”며 “배출권 거래제가 ‘보이지 않는 손’처럼 지속 가능한 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한다는 게 실증된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부 배출권거래제준비기획단 유범식 팀장은 “정부가 부여한 배출 할당량을 초과하면 불이익을 줬던 기존 제도와 달리 배출권 거래제는 기업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어 오히려 시장친화적인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기자는 영국과 독일의 도시를 둘러보면서 이곳 사람들이 한 줌의 햇볕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연 에너지를 활용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지난달 마지막 주 영국 런던과 독일 본은 일조시간이 오전 9시∼오후 3시로 6시간에 불과했고 낮에도 대부분 흐렸다. 그런 환경에서도 각 가정과 사무용 건물, 다리 등에 달린 태양광판을 통해 얼마 안 되는 햇볕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기자가 지난달 30일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눈이 부셨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햇볕은 화창하지만 주변에서 태양광판을 보기란 쉽지 않다. 독일에서 태양광 발전이 가능한 시간은 하루 평균 2.9시간. 우리는 이보다 24% 많은 3.6시간이지만 지난해 태양광으로 생산한 전기(2763GWh)는 독일(2만8000GWh)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런던·본·푈클링겐=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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