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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인사동으로 가며

입력 | 2013-12-23 03:00:00


인사동으로 가며
―김종해(1941∼)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궐(闕)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 등이 내걸리고
우모(羽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인사동은 옛 궁궐로 둘러싸인 구역에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운현궁, 그리고 좀 떨어진 덕수궁. 화자는 그중 한 곳에 있었던 것일까? 아닐 테다. 눈 내리는 고궁의 아치(雅致)를 만끽할 모처럼의 행운을 마다할 사람은 드물 테다. 시인은 화자의 집을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이라고 농담을 건네며 시를 연다. 아마 화자의 집은 인사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대문 안, 성채 같은 아파트일 테다. 요즘은 웬만한 아파트도 옛날 왕의 거처보다 더 안락하고, 어떤 아파트는 더 호화롭기까지 하다.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으면 퇴근길을 걱정하고 얼른 귀가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에 있다가도 밖에 나가고 싶어 들썽거리는 사람이 있다. 창밖을 보니 눈이 올 것 같다. 이런 날 집에 있을 수 없지. 화자는 가슴 설레며 집을 나서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날리는데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다. 문득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달콤한 외로움이. 화자는 로맨틱한 감성의 사람이다. 외로움도 잘 타고 그리움도 많다. 눈 와서 좋은 날, 화자가 불러낸 친구들이 인사동으로 하나둘 모일 테다. 밤 깊도록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눈발 같은 회포를 풀 테다. 근처 고궁에도 켜켜이 눈이 쌓이겠지. 서경에 서정을 섬세하게 포갠 시다. 김종해 시인의 다른 시 ‘눈’의 한 구절을 읊어본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눈이 내릴 동안/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