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 논설위원
10년쯤 후 MB 정부가 들어서자 “‘신지식’이라는 말을 빼 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긴 논란 끝에 들어주지 않았다. 5년 후 박근혜(GH) 정부가 서자 이번엔 “적당한 곳에 ‘창조경제’라는 말을 넣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두 번째라 대응이 쉬웠다. “우리의 지향점이 바로 창조경제임을 최대한 강조하겠다. 하지만 명칭이나 정관 변경은 곤란하다.” 이 단체 관계자는 “만약 MB 측 요구를 수용했다면 올해 초에도 거절 못 했을 테고 결국 만신창이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조적인 사례도 있다. MB 정부의 대통령 직속기구였던 녹색성장위원회의 양수길 위원장은 박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가 녹색위를 폐지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마련한 것을 알게 됐다(나중에 위상과 조직의 축소로 마무리됐다). 그는 ‘민간 쪽 추동력이라도 강화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동분서주한 끝에 10월 새 민간조직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한국포럼(SDSNK)’이라는 긴 이름으로. 그는 ‘녹색성장’을 못 쓰는 것이 너무 속상했지만 “대통령이 싫어하는 이름은 절대 안 된다”는 동지들의 주장을 꺾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작명은 엄청난 히트상품이 됐다. 기존 용어는 ‘기후변화 대응’ ‘환경친화적 개발’ ‘지속가능 성장’이었다. 리우협약, 도쿄의정서는 더 어려웠다. 환경(Green)과 경제(Growth)는 충돌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양자의 시너지를 모색하자는 취지로, 이렇게 귀에 쏙 들어오는 작명은 여태 없었다.
이어 국제기구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가 탄생해 서울에 본부를 뒀다. 녹색기후기금(GCF)도 이달 초 인천 송도에서 출범했다. 녹색성장에서 한국이 한 주도적 역할 덕분이다. 유엔은 작년 8월 녹색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로 SDSN을 출범시켰다. 앞서 말한 양수길 박사의 SDSNK는 고민 끝에 이 기구의 서울사무국 형태를 선택했고, 그래서 길고 이상한 이름이 붙었다.
MB의 녹색 애착은 극진했다. 정책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MB색 탈피’가 필요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대가가 컸다. 탄식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녹색 외면은 계속됐다. GCF 출범 때도 박 대통령의 참석 계획은 없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총재 등 국제기구 거물들이 대거 방한하자 막판에 돌아섰다. 하지만 대통령은 여기서 중대한 발언을 했다. “기후변화대응을 창조경제 핵심 분야의 하나로 삼겠다”고. 절묘한 반전이다.
기실 녹색성장은 인류 미래를 위한 문명사적 과제다. 온난화와 사막화 방지, 탄소세와 배출권 거래, 신재생에너지, 녹색기술, 관련 법률시장 등 연관 분야가 방대하며 하나같이 차세대 먹거리다. 긴말이 필요 없다. 주도권을 놓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녹색성장’ 용어도 복권시켜야 한다. ‘신지식인’ 기피는 한 정권의 치졸함으로 끝나지만 녹색성장의 실패는 미래세대에 두고두고 죄 짓는 일이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