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도공 이삼평이 神이 된 곳… 미인탕-사케가 한국인 반겨저가 티웨이항공 취항… 우레시노온천, 피부 매끈하게 해주는 명소
한겨울인데도 따뜻한 남쪽나라 규슈에선 이렇듯 산천초목이 푸르기만 하다. 영상5도의 쌀쌀한 날씨에도 전통료칸의 로텐부로 별실 정원에선 분홍빛 동백꽃이 만발했고 유카타차림의 여행자는 그 꽃과 초록의 식물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휴식한다. 우레시노온천의 와라쿠엔 료칸. 사가현(일본규슈)=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이곳은 일본 규슈의 사가 현. 거기서도 서남쪽, 바다에서 멀지 않은 아리타(有田) 정의 이즈미야마(泉山)다. 아리타 정은 1650년부터 이웃한 나가사키 항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을 통해 수출돼 유럽 황실을 매료시켰던 일본 자기 ‘이마리야키(伊萬里窯)’의 탄생지다. 이마리야키란 이삼평과 그를 따르던 조선 도공들이 이렇듯 어렵사리 찾은 고령토로 재현해낸 사가 현의 조선 자기다. 그 자기는 유럽 황실에서 그릇보다는 오히려 장식품으로 선호됐는데 수집에 광적이었던 작센왕국(독일)의 아우구스트 왕은 자기 군사(600명)를 베를린왕국 소유의 도자기 127점과 맞바꿀 정도였다.
하지만 이삼평과 일행이 요장을 짓고 불을 때어 조선 자기를 구현해낸 곳은 이마리가 아니다. 그 남서쪽 지근 거리의 아리타다. 그러니 ‘아리타야키’라 불려야 하는데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에 선적될 당시 수집처가 이마리로 표기되면서 이마리야키가 된 것. 이마리는 충남 공주 부근(정확히는 반포면) 도공 집안의 14세 소년 이삼평이 1593년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대에 납치돼 왜군의 길잡이를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급사로 철군(1598년)할 때 끌려와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이런 이삼평의 혼이 서린 사가 현. 규슈의 관문 후쿠오카와 17세기 일본의 관문 나가사키, 이 두 현 사이에 자리 잡은 이곳은 아직 한국인 여행자에게는 생소한 미답지. 하지만 이달 20일 저비용 항공사 티웨이 취항(사가국제공항)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가의 여행지로 안내한다.
규슈 지도를 보자. 부산에서 쾌속선이 오가는 하카다 항(후쿠오카 현)에서 해안을 따라 서남쪽으로 달려 사가 현으로 들어서는 니시규슈 자동차도로가 보인다. 이 도로는 가라쓰 만에서 끝나는데 만을 형성시킨 왼편(서쪽)의 반도 지형 북단에 하도미사키-사키는 곶(串)-가 있다. 이곳은 부근 요부코 마치(가라쓰 시)에서 시작한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11.2km)의 종착점. 그 길을 찾아 간 요부코 마치. 올레 들머리는 ‘나고야 성 박물관’ 아래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성은 없고 박물관만 있었다. 알고 보니 성은 철거됐고 박물관이 그 성을 대신한 것이었다. 허물어진 게 아니라 철거된 성. 도대체 여기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임진왜란 전쟁지휘부 나고야 성
[1]140년 역사의 대물림 양조장을 혼자 운영해온 ‘이데슈조’의 이데 요코 사장. [2]한국은행 본점을 설계한 다쓰노 긴코의 로몬. 우레시노온천의 공중탕 대문이다. [3]납치돼온 조선 도공들이 사가 현의 감시 속에 살았던 이마리의 오카와치 산중 마을(번요공원). 도자기 파편으로 장식한 다리에 ‘나베시바 번요’라고 씌어 있다.
그런 사연의 터인 만큼 박물관도 예사롭지 않다. 나고야 성이 조선 침략의 상징인 데 반해 박물관은 그걸 반성하며 한일 간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양국 간 이해의 공간이다. 하지만 ‘분로쿠의 역’과 ‘게이초의 역’을 임진, 정유재란이 아닌 조선침략전쟁으로 표기한 것은 아쉬움이 남고 ‘일본도 세계의 여러 나라와 함께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새로운 노력을 시작했다’는 부분은 작금의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한국어에 능통한 일본인이 한국인 방문객의 질문에 답해 주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요부코 항의 산 오징어회
일본을 20년간 두루 돌아다녀봤어도 산 오징어 회를 맛보긴 여기 사가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식당은 실내에 수조까지 설치하고 산 오징어를 즉석에서 회로 쳐 냈다. 이후 과정은 완벽한 일본식이어서 더더욱 흥미를 끈다. 그곳은 산 오징어회로 일본 전국에 이름난 요부코 항. 내가 찾은 ‘가와타로’라는 전문식당 조리사는 산 오징어회라면 달인의 경지에 이른 이로 40초 만에 껍질을 벗긴 뒤 먹기 좋게 몸통에 격자로 칼집을 넣어 상에 낸다.
신속한 손질엔 이유가 있다. 막 잡은 것은 살이 투명하고 쫄깃하지만 시간이 가면 탁해지며 식감이 떨어져서다. 먹는 법도 우리와는 다르다. 몸통만 겨자간장에 찍어먹고 나머지(머리와 다리)는 튀김이나 소금구이로 조리해준다. 밥과 국 등이 포함된 정식은 1인분에 2625엔(약 2만7000원). 요부코 항은 후쿠오카, 사가 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거리다.
도공을 대거 납치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다. 가마의 실내온도를 1300도까지 높이고 거기서 흙을 돌처럼 단단하게 구워낸 게 17세기까지 중국과 조선, 두 나라만 보유한 최첨단 기술이어서다. 서양에서 그걸 터득한 건 이삼평의 아리타야키 100년 후(1712년 독일 작센왕국의 마이센)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도 기술경쟁은 치열했다. 그러니 사가의 나베시마 번(藩)이 그 유출을 막으려 한 건 당연하다.
나는 그 현장을 이마리 시내에서 6km 떨어진 오카와치 산의 ‘나베시마 번요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수직 봉우리로 둘러싸인 철옹성 형태의 깊은 산중. 조선 도공은 여기 갇혀 엄중한 감시하에 자기를 구우며 살아야 했다. 지금 이곳의 수많은 도자공방은 그 후에 일군 가마와 작업장. 저마다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데 예스러운 골목이 주변 산과 두루 잘 어울려 산책 삼아 작품을 감상하며 쇼핑하기 좋다.
사가의 온천-소박한 화려함이 그 매력
우레시노 온천은 규슈에서 이름난 곳인데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게 사가 현의 대표 온천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8년 전 500명이던 한국인 방문객이 지난해 2만 명으로 늘 만큼 인기가 높다. 고풍스러운 골목의 온천가가 강, 숲과 이뤄내는 고즈넉한 분위기에다 몸을 담그는 순간 올리브유를 뒤집어쓴 듯 피부가 매끈거리는 평생 잊지 못할 그 느낌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을 찾게 하는 핵심이 아닌가 싶다. 이런 걸 일본에선 ‘비진노유’(美人の湯·미인탕)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 강가엔 공중온천탕으로 쓰이는 독일식 건물이 있는데 메이지시대에 일본을 찾은 독일의 의학자 프란츠 시볼트가 수(水)치료 연구차 이곳을 다녀간 게 인연이 돼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거리엔 시볼트 아시유(족탕)도 있다.
이 우레시노에서 내가 묵은 전통 료칸은 ‘와라쿠엔(和樂園)’. 이곳엔 86도 온천수가 공급되는데 겨울엔 수송 도중 식어 물을 타지 않고 탕에 담는다. 우레시노는 녹차로도 이름난 곳. 그래서 다원을 직영하는 와라쿠엔은 녹차를 료칸 테마로 삼아 녹차탕을 두었다. 팩에 담긴 녹차가 우러나온 탕에선 녹차의 풋풋한 향까지 즐긴다. 가이세키 요리(정찬)상에는 말린 찻잎을 올리는데 그 잎을 직접 갈아 가루로 만들어 생선회나 사가규 스테이크에 뿌려 먹는다. 와라쿠엔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녀가며 더 유명해졌다.
예서 멀지 않은 다케오도 사가 현을 대표하는 온천마을로 무려 1300년 역사가 자랑거리다. 그리고 여기선 꼭 들러볼 공중탕이 있는데 우리가 알 만한 이가 설계한 건물이라서다. 그것은 ‘누문(樓門)’을 대문 삼은 메이지 건축물로 서울시내 화폐금융박물관(전 한국은행본점·1912년)과 도쿄역(1914년)을 설계한 메이지시대 건축의 대부’ 다쓰노 긴코의 작품이다.
규슈 청주(사케)의 본고장-사가 현
규슈는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두루 받아 사케보단 소주를 선호하는 편. 그런데 사가만큼은 나머지 여섯 개 현과 달리 사케를 더 좋아한다. 풍부한 물과 평야에서 생산된 쌀 덕분인데 ‘사가 인정주(The SAGA)’제도-샴페인 코냑과 같은 원산지호칭관리-에 어떤 자리든 첫잔은 사가 인정주로 건배하자는 조례까지 둘 만큼 사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이웃 후쿠오카 시내에는 사가 인정주만 판매하는 ‘사가구라’라는 이자카야까지 있다.
나는 우레시노 온천의 강가에서 140년째 ‘도라노코(虎之兒·とらのこ)’라는 이름의 술을 생산하는 이데(井手) 주조에 들렀다. 작고 예스러운 양조장에선 한창 술을 빚느라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 집 술은 단맛에도 감칠맛이 풍부한 균형감이 좋다. 사가의 사케가 대부분 아마구치(단맛)인 걸 감안하면 도라노코는 특색을 지닌 술이다. 양조장은 은행 직원이던 남편(65세에 사망) 대신 대물림해 평생 지켜온 이 집안 며느리 이데 요코 씨(80)가 홀로 운영 중이다.
■Travel Info
◇현지 정보 ▽사가 현: www.pref.saga.lg.jp, www.japanpr.com ▽관광연맹 △사가 현: www.welcome-saga.kr △아리타: www.arita.jp ▽우레시노 △와라쿠엔: www.warakuen.co.jp △이데 주조: www.toranoko.co.jp ▽사가규(肉): www.sagagyu.jp
◇도스(Tosu)아웃렛: 후쿠오카 공항에서 30분 거리의 교통 요지에 위치. 여주와 고템바 아웃렛과 동일한 체인(프리미엄아웃렛). 할인쿠폰 제공. www.premiumoutlets.co.jp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