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스크린’ ‘스펙터클’, 정은은 ‘스포츠’로 주민 달래어려서부터 강한 승부욕에 욱하는 잔인한 성격 드러내드라마틱한 폭력 숙청극…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국제사회에 부각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기어츠의 극장국가이론 틀이 북한에 꼭 들어맞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최고 통치자가 장기 집권하는 국가에서는 지도자의 취미나 재질(才質)이 통치행위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된다. 김정일 시대에는 스크린(screen·영화)과 스펙터클(spectacle·대규모 공연)로 체제를 선전하고 군중을 동원했다면 김정은 시대에는 스포츠(sport)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다.
조선중앙통신은 최근 “주말마다 평양에서 인기 스포츠 경기를 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22일에는 레슬링 경기가 열렸고 29일에는 여자 권투 경기를 열 예정이다. 김정은은 어릴 적부터 롤러블레이드 농구 승마 제트스키 수영 같은 스포츠와 게임을 좋아했다. 스위스 유학시절에는 스키를 즐겼다. 그가 마식령 스키장을 건설하고 평양에 미림승마클럽 문수물놀이장을 세운 것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한 스포츠 취미가 반영된 것이다.
주민의 불만을 경기를 통해 발산시키고 정권 유지 수단으로 스포츠를 이용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흔히 써먹던 수법이다. 예술 공연과 달리 스포츠에서는 승패가 확연하게 갈린다. 김정은은 농구 경기나 게임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고 강한 승부욕을 드러냈다. 김정은이 구슬 게임을 할 때 형 정철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구슬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정은이 화를 내며 놓친 구슬을 형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후지모토 겐지는 “동생이 그렇게 과격한 대응을 하는데도 형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고 목격담을 전한다. 김정일이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 중 “나를 닮았다”며 둘째 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첫째 정철에 대해서는 “계집애 같아서 안 돼”라며 탈락시킨 결정은 자녀 관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김정은의 승부 근성과 잔인하고 욱하는 성격은 고모부 장성택 처형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김정일은 친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함께 자란 동생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을 의심하면서도 한수 접고 봐주었다. 그러나 화가 나면 형의 얼굴을 향해 구슬도 던진 김정은에게 고모부 정도는 주저 없이 분노를 폭발할 수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예술적 취향의 아버지가 극장국가를 만들었던 데 비해 김정은은 현실정치를 무대처럼 만드는 극장통치를 하려는 것 같다. 김정은은 연금했던 장성택을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의 두 번째 열에 앉혔다가 끌어내는 장면을 연출했다. 전국에서 주민을 동원해 장성택의 죄상을 규탄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군중집회를 열게 했다. 사형 판결을 받은 법정에서 인민복을 입고 수갑을 찬 장성택의 초췌한 모습은 극적 효과가 충분했다. 2인자를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극화해서 권력을 공고화하고 북한의 파워엘리트와 인민에게 경각심을 준 것이다.
김정일은 세습의 준비 기간이 길어 드라마틱한 숙청 없이도 주체이념을 극화하고 제도화해 권력 승계를 연착륙시킬 수 있었다. 준비기간이 짧았던 김정은의 세습극은 극단적인 폭력성을 노출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막장 드라마로 전락했다. 파워 엘리트의 숙청을 비밀에 부쳤던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달리 김정은의 극장정치는 거리낌 없는 공개주의다. 김정은의 통치 방식이 극악한 폭력성을 노출하는 막장무대로 가면서 북한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종파분자들을 제압하는 데는 성공할지 몰라도 국제사회에서는 그의 반인륜성에 대한 분노와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