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올 8월 필리핀 마닐라 도심을 메운 수십만 명의 시위 군중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구호들이다. 일부 시민들은 돼지 가면을 쓴 채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2010년 취임한 이래 벌어진 최대의 시위에서 ‘돼지’가 주제로 떠오른 것은 국회의원들의 선심성 지역사업 예산 때문.
필리핀 국민들은 지역사업 예산을 돼지고기에, 그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주무르는 의원들을 돼지에 비유한 것이다. 필리핀 국민들은 의원들의 자기 지역구 챙기기 예산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며 아키노 대통령에게 이의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오죽 부패가 심했으면 국민들이 명색이 국회의원들을 돼지에다 비유해 노골적으로 조롱하면서 시위를 벌였겠는가.
필리핀 사람들은 ‘돼지고기 저장통 정치’를 제도화된 부패, 국민의 세금을 훔치는 거대한 음모로 본다. 나라의 금고를 약탈하는 행태라고 보는 것이다. 선심성 예산들이 의원들의 호주머니나 의원들이 만든 가짜 비정부단체로 직접 흘러들어 가는 것 이외에, 정부의 적극적 도움 또는 친절한 무시 덕분에 의원들을 후원하는 기업들에 특혜로 돌아간다.
원래 계획했던 지역구 사업은 없어지고 의원들과 유착된 기업들을 위해 지역구민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사업에 예산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선심성 예산을 따내는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그것을 홍보해 유리한 경쟁을 할 수 있으며, 예산 일부를 착복했다면 그 돈으로 유권자를 매수할 수도 있다. 결국 국민 세금으로 사생활에서 호사를 누리며, 정치에서는 승승장구한다는 것이다. 미국도 부패로 인식하는 것은 마찬가지. ‘정부 낭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란 단체는 “미국에서 의원들이 돈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세금이 정치적 편파주의에 따라 빠져나가고, 워싱턴의 유력 정치인들의 재선 등을 위해 쓰이는 것은 부패의 형태”라고 주장했다.
아키노 대통령은 선거 때 “돼지고기 저장통 정치”를 없애겠다고 공약했으나 집권 이후 오히려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원의원인 헤나디나 아바드는 아키노 집권 전인 2009년엔 지역사업 예산을 1300만 페소밖에 따내지 못했다. 그러나 2012년 그보다 7배나 많은 9200만 페소를 확보했다. 아키노의 핵심 측근으로 예산장관인 남편 덕이라는 구설수에 올랐다.
여성 사업가 재닛 나폴리는 상·하원의원들이 지역사업 예산에서 빼돌린 돈을 세탁해 준 대가를 받아 미국에 100만 달러짜리 콘도를 사는 등 호화 생활을 한 것이 드러났다. 필리핀에는 돼지고기에 반드시 겨자 소스가 따라오듯 부패가 함께한다고 한다. 그 부패의 주범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것이 바로 ‘돼지고기 저장통 정치’다. 필리핀 정치를 지배해 온, 고질적 예산 부패 관행이 결국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국회의원들이 정부 예산안에 끼워 넣은 ‘쪽지예산’이 11조500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올해 정기국회 100일이 다 가도록 한 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해 자칫 ‘정기국회 법안 통과가 전무한 식물국회’라는 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울 뻔했던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챙기기에는 엄청나게 열심히 뛰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액수이다. 지난해 말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선심예산을 부탁하는 쪽지가 2000여 개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극악하게 싸우던 여야 의원들이 쪽지예산을 위해서는 은밀하게 담합한다는 것은 20년 넘은 한국 국회의 전통(?)이 되었다.
쪽지예산은 부패의 상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어느 장관이 ‘포크 배럴’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가 혼이 났다. 그는 고상하게 영어 단어를 사용했으나 여야 의원들은 스스로 ‘돼지’라고 표현하며 그를 질타했다. 그러나 이제 국민들이 의원들을 그렇게 부를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고질적 관행이 국민들의 반감을 넘어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필리핀을 보라. 정부와 국회가 힘을 합쳐 하루빨리 개혁에 나서야 한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