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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의 정치학…별보고 출근, 별보고 퇴근해야 ‘별’ 단다?

입력 | 2013-12-29 17:42:00


《원하는 직장에 어렵사리 입사하더라도 그게 다가 아니다. 모 대기업에서 유능하기로 소문난 한 고참 부장은 임원 승진이 안 되는 이유를 최근에야 알았다. 어떠한 윗사람도 일만 잘하는 부하직원을 자기 일처럼 챙겨주진 않는다는 거다. 직장에서 ‘능력’만으론 잘나가기 어렵다. ‘능력 플러스 정치’가 필요한 게 우리 현실이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는 출근길 직장인들.


취업 전쟁의 시대, 원하는 직장에 입사하는 것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짜릿하다.

물론, 더 짭짤하다. 당장 다음 달부터 통장에 입금될 월급을 생각할 때마다 밀려오는 도도한 행복감. 돈 위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나날. 주변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은 또 어떤가. 월드 스타, 거의 싸이 급이 된 기분일 것이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0명 중 입사에 성공하는 사람은 4명이 채 안 된다. 이런 가운데 입사에 성공했다면 우선 이 기분, 만끽하기 바란다. 왜? 오래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찬물을 끼얹어 대단히 미안한데, 이게 현실이다.

가족 같은 직장은 없다!

신입사원은 진정한 무한경쟁 지대에 들어섰다고 보면 된다. 사느냐 죽느냐, 매일 기로에 설 것이다. 화기애애한 가족 같은 분위기의 직장? 개가 먹어치운지 오래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의 신화는 깨졌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숫자를 상회한 지도 꽤 지났다. 지금 비정규직인가, 아니면 정규직인가. 정규직으로 입사했다면 그나마 기회는 열려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에게 기회는 잔혹하리만치 제한적이다.

신입사원 대부분은 ‘별’을 다는 것을 꿈꾼다. 기업의 별, 임원이 되겠노라 일단 다짐해본다. 그러나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아는 신입사원은 별로 없다. 입사 직후부터 임원 승진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저 세월이 지나 부장 정도까지 올라가면 기회가 열리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해볼 뿐이다. 그 즈음에 준비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까? 아니다.

몇 해 전 한 글로벌 대기업에서 사내 정치(office politics)와 관련해 강의를 했다. 강의 후 수강생들과 식사를 하는데 한 분이 다가왔다. 그는 명문대 출신으로 입사 초기부터 일을 열심히 했고 인정도 받았지만 부장에 멈춰 이사 승진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스스로 원인을 분석해보니 ‘사내 인적 네트워크 부족’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모임에 참가해왔다고 한다.

“그걸 이제 알았냐?”

그런데 얼마 전 임원이 된 입사동기를 만나 “요즘 인적 네트워크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 동기가 한 대답에 충격을 받았단다.

“나는 신입사원 때부터 그걸 알았는데, 넌 이제 알았냐?”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바로 이것, 신입사원 때부터 ‘그걸’ 알았다는 점이다. 미리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갖추려고 노력해온 사람은 임원 승진을 한 반면, 그렇게 못한 사람은 만년 부장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 유념할 일이다.

정치에서도 국회의원이 3선 정도에 도달하면 프로야구의 1군, 2군처럼 운명이 갈린다. 1군은 대통령후보군이다. 2군은 국회 상임위원장 후보군이다. 초선 시절 그들 간엔 큰 격차가 없었다. 스펙 면이나 역량 면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언젠가 대통령에 도전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면에서도 차이가 없다.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을까. 운? 노력? 역시 노력이다.

10년 정도 집중해서 한 가지 일만 하면 자연스럽게 달인이 된다. 그러나 집중하지 않고 이일 저일 하면 달인이 되지 못한다. 국회의원은 유능한 보좌진을 둬야 하고, 의원들 사이에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야 하며, 언론과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로 어필해야 한다. 결국 정치란 사람 장사이고 정치인은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입사동기들 간에 스펙 차이나 역량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특히 공채를 거친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임원을 꿈꾼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임원에 오르는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안 되는 0.8%에 불과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011년 11월 발표한 ‘2011년 승진·승급 관리 실태조사’ 결과가 그렇다. 대기업은 0.6%다.

여성이라면 확률은 더 떨어진다. 삼성전자가 2012년 6월 발표한 ‘2012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이 회사 전체 임원 중 여성의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전체 직원 22만 명의 40%가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이 임원 될 확률은 1만 명 중 2명, 0.02%의 참혹한 수준이다.

입사 직후 신입사원은 선택해야 한다. ‘1%로 살 것인지 아니면 99%로 살 것인지’를. 상위 1%에 속해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사생활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해야 별을 달 수 있다. 우리 기업문화에서 조기 출근에 조기 퇴근 포기는 필수다. 인간적으로 살아보겠다고 생각한다면 일찌감치 99%에 속하기로 마음먹는 게 속 편할 것이다. 현실은 99%인데 이상은 1%라면, 속만 쓰릴 뿐이다.

얼마 동안 사생활을 포기해야 할까? 20년 이상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이 임원이 되기까지 평균 21.2년이 걸린다. 대기업 임원이 되려면 23.6년이 소요된다. 28세에 대기업에 입사하는 경우 0.6%의 확률을 뚫는다고 하더라도, 52세는 돼야 임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프레시하게 넋 놓고 있다간…

임원은 ‘별’이다.


그렇다면 상위 1%에 속해보겠다고 마음먹는 직장인은 구체적으로 얼마나 될까. 잡코리아 에이치알파트너스가 지난 4월 전국 남녀 직장인 69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임원 승진을 준비 중인 직장인은 남성이 38.5%, 여성이 25.8%, 평균이 31.8%였다. 현실에 비해 여성 직장인의 의지가 의외로 도발적이다.

임원 승진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는 대략 언제쯤일까. 직장 경력 3∼5년 때부터 준비한다는 응답이 26.8%, 입사하는 순간부터 준비한다는 응답이 22.3%였다. 신입사원 때부터 상위 1%에 속해보려 준비를 시작하는 직장인이 대략 5명 중 1명 정도에 불과하다. 다른 말로 5명 가운데 4명은 신입사원 시절, 그 중요한 시기를 프레시(fresh)하게 넋 놓고 지낸다는 뜻이다.

임원이 되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알아보자. 직무분야 전문지식 습득 44.1%, 인맥관리 41.4% 순이었다. 그런데 업무 역량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임원 승진심사에서 결정적 고려사항이 아니다. 부장 정도까지 승진할 정도면 업무 역량은 그야말로 도 긴 개 긴. 인사권자인 사주(또는 CEO)의 마음을 움직일 ‘결정적 그놈’은 과연 뭘까. 충성도? 섭외력? 판단력? 결단력? 통솔력?

대한석탄공사 사장을 지냈고 ‘임원의 조건’을 집필한 조관일 창의경영연구소 대표가 꼽은 임원의 첫 번째 조건은 ‘정치력’이다. ‘사내 정치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신입 때부터. 사내 정치를 잘 모르면 임원이 되기도 어렵지만, 된 이후에도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고 한다. 조 대표가 꼽은 두 번째 조건은 ‘충성심’이고 세 번째는 ‘추진력’이다.

미세하지만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 일부는 ‘충성심’을 첫 번째 조건으로 꼽기도 한다. 틀린 관점은 아니다. 그런데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도 결국 사주(또는 CEO)를 상대로 하는 사내 정치의 일종이다. 사주(또는 CEO)의 처지에 서보면 답이 바로 나온다. 업무 역량이 비슷하다면 어떤 사람을 임원, 특히 등기임원으로 삼고 싶을까. 역시 충성심이 높은 사람일 것이다. 충성도가 높다면 업무 역량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저들은 생각한다. 왜 이토록 충성심에 매달릴까. 그것은 당신이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는 이유와 같다. 외롭고 두렵기 때문이다.

능력보다 충성심

인간은 기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또 불완전하기에 늘 두려워한다. 그런데 사주(또는 CEO)가 되면 이런 감정이 극대화한다. 더 외로움을, 두려움을 느낀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피라미드 구조다. 그 파라미드의 정점에 혼자 서 있다고 생각해보라! 책임을 오롯이 혼자 져야 한다면? 결정이 잘못될 경우 회사가 망할 수도, 교도소에 가야 할 수도 있다면?

이때 사주(또는 CEO)는 ‘누군가 이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없을까?’ ‘이 외로운 결정에 확신을 불어넣어줄 사람이 없을까’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때 부르면 군말 없이 신속하게 달려와 조언도 해주고 확신도 불어넣어주는 존재가 바로 임원이다. 더 정확한 조언, 더 확고한 확신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별 중의 별, 차기 CEO감이다.

이사회는 늘 아름다운 결정만 내리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비난을 받거나 비판을 감수해야 할 때가 더 많다. 감원 결정도, 임금삭감 결정도, 사업철수 결정도 내려야 한다. 때로는 편법, 불법 행위도 공모해야 할지 모른다. 회사 밖에 나가 발설하면 회사가 위기에 빠지는 비밀을 공유해야 한다. 사주(또는 CEO)가 충성도를 따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만한 충성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사주(또는 CEO)가 그런 충성도를 하루아침에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꽤 긴 시간인 20여 년 동안 내 사람이 될 만한지 아닌지를 진단하는 것이다. 처음엔 멀리 두고 눈여겨보다 나중에는 가까이 두고 검증하는 식이다. 그래서 임원이 되기 원하면 가능한 한 빨리 저들 곁으로 다가가야 한다. 최대한 신속하게 직속 라인에 들어가는 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A급 직원은 따로 관리

사실, 어느 기업이건 A급 직원은 입사 초기부터 따로 관리한다. 회사가 이 직원의 근무지나 경력을 엘리트 코스로 관리해준다. 그러다 못 따라오면 중도 탈락시키고 잘 따라오면 요직에서 요직으로 돌리며 키워나간다.

이 때문에 직장에서는 첫 근무지가 대개 자신의 라인이 된다. 첫 상사가 그만큼 중요하다. A급 직원을 따로 관리하는 이유도 결국 라인과 관련이 깊다. 유력 부서의 유력 인물 밑에 잠재력 있는 신입사원을 배치해 회사를 이끌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가는 전략이다. 실력도 있지만 충성도도 높은 직속 진골 라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입사 초기 A급 직원으로 분류돼 핵심 부서를 첫 근무지로 배정받았다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일단 직속 라인에 속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반면 B급 이하 직원으로 분류돼 평범한 부서의 눈 풀린 상사 밑에서 일하는 처지가 됐다면 빨간불이 켜졌다고 봐야 한다. 신입사원에게 빨간불 운운하다니 너무 잔인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엄연한 현실, 실제 상황이다. 이 경우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발군의 역량 발휘로 B급 딱지를 떼거나 초강력 충성 맹세 요법으로 기존 라인에서 탈출해 직속 라인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직장인이 이 대목에서 한 번 걸린다. 무엇에? 인정 또는 의리에. 내가 모시던 상사, 함께 울고 웃던 동료를 ‘버린다’는 느낌? 그 느낌 아니까 차마 잔인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눌러앉기로 하고 결국 함께 침몰하고야 만다. 그들을 버릴 바에는 차라리 나도 함께 망하는 것. 아름답거나 장렬한가.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것이 실제다. 임원이 되기를 원한다면, 직속 라인에서 부른다면 언제라도 옮겨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 불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찾아가야 한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이게 녹록지 않다.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만약에 거절당한다면 보통 민망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적당한 명분이나 사적인 자리를 만들어 찾아가길 권한다. 어차피 일하는 것, 직속 라인에서 일해야 승진 기회도 더 보장되고, 하다못해 배우는 것도 더 많다. 이런 것이 바로 인맥관리다.

공범의 치명적 매력

인맥관리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 하나가 있다. ‘인맥이 넓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맥의 질이다. 광범위하게 회사 내외 인맥을 쌓아 나쁠 건 없지만, 무엇보다 회사 내 직속 라인과 아주 끈끈한 사이로 엮여야 한다. 직속 라인에 속하더라도 그 속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계속 상하 라인을 관리해야 한다. 나를 확실하게 끌어주는 상사가 단 한 명만 있어도 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는다.

직속 라인에 속하더라도 어떤 충성심을 보여줄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사주(또는 CEO)는 한번 충성심을 보였다고 단번에 넘어오지 않는다. 저들은 지켜야 할 것이 많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쉽게 신뢰하지도 못할뿐더러 변덕스럽기도 하다.

충성심을 보이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회사에서 충성심을 돋보이게 만들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까. 무릎을 꿇는 일 정도는 오히려 애교에 가깝다. 이보다 훨씬 비굴한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순도도 높아야 하지만, 경쟁자의 그것과 차별성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저들이 당신에게 중독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당신의 충성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치명적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충성심을 보이기에도 버거운데, 거기에 치명적 매력까지 더하라니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래야 0.8%에 들어갈 수 있다. 치명적 매력을 더하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강력한 한 가지 방법은 ‘죄를 숨기는 데 적극적으로 조력하고 끝까지 입을 닫는 것’이다. 공범이 되는 것이 순도 높은 충성심을 보일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이야기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대기업에서 사주의 신임을 받아 전문경영인 CEO 자리에 오른 사람치고 형사 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 받을 위기에 처한 적이 없는 사람, 국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지목되지 않은 사람, 감사원 조사나 정부 위원회 조사에 불려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기자들은 안다

정치권에서 계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회의원도 정치하면서 교도소 담장 위를 걷지만 기업 경영진도 매한가지다. 편법이나 불법을 저지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충성심이 있어야 임원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해낼 자신이 없다면, 상사의 자가용 오일 교환 날짜를 챙겨 적시에 교환해주는 열의라도 보여야 한다. 이것도 할 자신이 없다면, 99%로 살아가는 게 맞다.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어떤 궂은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프로페셔널이다.

언론계 기자라면 누구나 다 안다. 기자가 대기업 사주에 대해 안 좋은 내용으로 기사를 쓰고 있으면 해당 기업의 그 쟁쟁한 홍보담당 임원들이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언론사에서 죽치면서 기사를 빼달라고, 혹은 사주의 이름이라도 안 나가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요구해 관철시키는 사실을 말이다. 그야말로 수단, 방법 안 가린다. 자존심 때문에 이런 궂은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아마추어다.

이 대목에서 인맥은, 특히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의 인맥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출마를 하겠다는 사람치고 정치권에 그나름의 인맥이 없는 사람은 없다. 보통은 실력자 아무개도 잘 알고 아무개도 잘 안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러니까 공천을 받는 데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다름 사람이 공천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뭘 착각한 것일까. ‘그냥 아는 사이’와 ‘잘 아는 사이’의 차이를 몰랐기 때문이다.

인맥은 量이 아니라 質

같은 회사에 20년 정도 근무하면 사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된다. 특히 회장이나 사장 이하 임원 대부분과는 아는 사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속에서 누구는 임원으로 승진하고 누구는 탈락한다. 탈락한 사람은 대부분 그들과 ‘그냥 아는 사이’인 사람일 것이다. 반면에 승진한 사람은 그들과 ‘잘 아는 사이’인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공천을 확신하며 대통령과도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바로 휴대전화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보세요. 대통령이 곧바로 받거나 최소한 얼마 뒤에라도 리턴 콜이 오지 않는다면 ‘잘 안다’고 하지 마세요.”

잘 아는 사이란 이런 사이다. 전화를 언제나 반갑게 또는 기꺼이 받아줄 정도의 사이다. 이런 점에서는 A급 직원도 방심해선 안 된다. A급 직원이랍시고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충성심 따위 우습게 알고 지내다가는 ‘주류 계파와 잘 아는 사이’의 지위에서 곧바로 밀려난다. 충성심은 사주(또는 CEO)가 인정하는 주류 계파에 들어가게도 하고 또 거기서 쫓겨나게도 한다.

구태 정치의 상징이라는 계파,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을 계파는 정치권에만 있는 게 아니다. 계파는 회사에선 주로 ‘라인’으로 불리는데 상당수 회사에서 엄존한다. 라인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만한 유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떼를 지어 적을 상대하는 편이 혼자 상대하는 편보다 확실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소위 ‘라인 불멸의 법칙’은 인간의 생존본능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라인 불멸의 법칙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계파 없이 정치를 한 사람은 없다. 상도동계, 동교동계, 친노계, 친이계, 친박계가 이를 증명한다. 정치권의 별, 국회의원도 결국 어떤 계파에 소속돼야 달 수 있다. 언제나 쇄신 대상으로 언급되지만 정치권에서도, 회사에서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회사의 직속 라인은 물론 사주(또는 CEO) 라인이다. 그러나 정작 적지 않은 사주(또는 CEO)는 직원들에게 “줄을 서지 말라”고 역설한다. 정말 역설적인 시추에이션이 아닐 수 없다. 더 웃긴 건,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열심히 따르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 나도 그랬는데’라고 생각한다면 바보처럼 살아왔다고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줄을 서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나 이외 누구 밑에도 줄을 서지 말라’는 뜻이다. ‘나에게 맞서는 어떤 라인도 만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직속 라인 이외 어떤 라인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라인이다. 어떤 조직이든 무조건 직속 라인에 들어가고 볼 일인 것이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적지 않은 직장인이 줄서기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인크루트가 2010년 6월 직장인 105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무당파로 남겠다’는 응답자가 43.8%였다. 우매한 다수임에 틀림없다. 99%에 속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관계없다. 하지만 1%에 속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사주 직속 라인, 진골 라인에 들지 않고는 임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당파로 지내다 부장급 정도에 라인을 잡겠다’는 사람도 꽤 있다. 나름 영리한 전략일 것 같지만, 사주(또는 CEO)는 생경한 충성심에 거부감을 보일 것이다. 묵은 김치같이 오래된, 충분히 검증된, 순도 100%의 충성심이어야 저들은 안심한다. 라인에 속할 요량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는 게 좋다. 그래야 나중에 대접받는다. 저들이 때 되면 알아서 이사 승진을 챙겨줄 정도의 대접 말이다.

승진의 정치학은 결국 충성의 정치학이자 직속 라인의 정치학이다.

이종훈│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 이 기사는 신동아 2013년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