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근 서울중독심리연구소 소장 인터뷰“끝없이 타인에 집착 관계중독, 마약보다 무섭죠”
김형근 서울중독심리연구소 소장. 사진=지호영 기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낯모르는 사람과도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게 현대인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촘촘한 인간관계 그물망에 싸여 지내지만 정작 많은 사람이 외로움을 느낀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과 치열한 경쟁에 지쳐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과 정성을 기울일 시간적 여유가 없다. 물질적 가치가 강조되는 시대다 보니 깊이 있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기 어렵다.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인간관계에 매달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무리한 부탁을 받더라도 관계가 끊어질까 봐 거절하지 못하고, 만남과 인맥관리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뒷전인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일 만큼 인간관계에 집착하고, 주변에 누가 없으면 불안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는 등‘관계중독’에 빠진 현대인이 늘고 있다. 관계중독에 대해 연구하고 여기에 빠진 이들을 치료해온 김형근 서울중독심리연구소 소장(사진)으로부터 그런 현상의 원인과 치유책에 대해 들어봤다.
“사회적으로 다양한 그룹이나 관계에 젖어드는 건 외로움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관계중독은 아니다. 다만 관계중독의 정서적 특징이 외로움이다.”
만남과 인맥관리에 올인
▼ 관계에 중독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상대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나’ ‘나를 떠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돼 전전긍긍하고, 관계에 집착해 자신을 ‘올인’함으로써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상대에게 쏟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관계중독자에게 ‘나’는 없다. 가령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바로 통화가 안 되면 ‘나를 싫어하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순간 불안이 확 올라오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 어렵다. 에너지가 온통 상대에 쏠리기 때문에 일상에서 자기 삶을 영위하기도, 스스로를 돌보기도 어렵다.”
“지나치게 외로움을 타고 의존적 성향을 지닌다. 남성성이 목표지향적이라면 여성성은 관계중심적이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관계중독에 빠질 위험이 훨씬 크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을 안고 살지만 상처를 받으면 외로움이 짙어진다. 특히 흡인력이 강한 사랑의 상처가 그렇다. 관계중독에 빠지면 외로움에 허덕이면서 끝없이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보호해줄 상대를 찾게 되는데, 관심이 친구나 동료보다 이성에게 향하게 된다. 그래서 관계중독은 이성 간에 더 두드러진다.”
▼ 관계중독이 오히려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인가.
“관계중독자는 상대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분노한다. 상대는 관계중독자의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만 향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피곤하고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상대와 관계가 끝나면 관계중독자는 오히려 평온해진다. ‘저 사람은 언젠간 떠날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생겼던 불안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온한 상태가 오래가지 못해 또다시 다른 상대를 찾는 일이 반복된다.”
▼ 관계중독에 빠지는 원인은 무엇인가.
▼ 어린 시절 애착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관계중독에 빠지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이다. 자라면서 부모와 정서적으로 유기된 불안과 슬픔, 외로움을 겉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 욕구가 충족되고 상처가 해소된다면 괜찮다. 그런 기회조차 못 가진 상태로 성인이 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30대 초반인 K씨(여)는 어린 시절 수백억 원대 자산가인 자영업자 아버지가 마약복용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자 일로 바쁜 어머니에 의해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툭 하면 짜증과 신경질을 내는 할머니에게 구박받으며 자란 K씨는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아이들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혹은 너무 친해지면 자기 가족사를 알게 될까 봐 불안과 두려움에 떠느라 맘 놓고 어울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또래와의 관계도 순탄치 못했던 K씨는 늘 외롭다 보니 성인이 된 뒤 수많은 남자를 탐닉하게 됐다.
진짜 ‘나’를 찾는 노력 필요
20대 중반인 대학생 L씨(남)는 어린 시절 맞벌이로 바쁜 부모 대신 종종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있으면서 툭 하면 며느리 욕을 했고, L씨 엄마도 아들에게 시어머니 욕을 일삼았다. 두 사람 사이에 끼여 누구 편도 들지 못하던 L씨는 아버지로부터 늘 야단을 맞고 청소년 시절 집단 따돌림까지 경험하면서 ‘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품게 됐다. 성인이 된 후 L씨는 연애하면서 상대에게 사랑을 확인받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실연을 핑계로 주변 선배나 친구에게 끊임없이 하소연을 늘어놓아 애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마저 떠났다.
김 소장이 치료한 관계중독 환자를 보면, 30대 여성이 가장 많고 남성은 10% 정도를 차지한다. 관계중독은 쉽게 치료되지 않는데, 치료기간이 길게는 4년까지 걸리기도 한다. 다른 유형의 중독환자와 마찬가지로 관계중독자는 스스로 상담소나 병원을 찾는 경우가 드물다. 알코올중독이나 게임중독처럼 외형적으로 눈에 띄는 문제 행동이 없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눈치 채기 어렵다. 환자는 끊임없이 고통 받지만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 환자가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어려움은 뭔가.
“상대로부터 버림받을까 봐 두렵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한다. 자신을 괴물 같고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며,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기 비하, 외로움, 공허함 같은 증상을 공통적으로 호소한다. 자신을 별 볼일 없는 사람 등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픈 경험이 만들어낸 가상이다. 관계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걸 멈추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 관계중독이 지금의 사회현상과 어떤 관련이 있나.
“관계중독자가 과거보다 확실히 많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핵가족과 맞벌이 영향이 크다. 과거 대가족 시대에는 부모가 바쁘더라도 조부모와 삼촌, 이모 등 친지가 함께 살면서 아이와 친밀감을 쌓을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은 아이를 조부모 손에 맡겨놓고 주말에나 얼굴을 보러가는 부모가 많다. 조부모가 시골에 있으면 아이가 부모와 함께할 시간이 더 줄어든다. 부모와 떨어지는 유기 경험이 쌓이면서 정서적으로 친밀감을 맺지 못하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그 경험이 부모는 물론, 다른 누군가로부터도 해소되기 어려운 사회가 되면서 관계중독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 관계중독에서 헤어나려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이 있다면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중독’은 질병이고 이미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단계기 때문에 전문가 도움이 필요하다. 최근 관계중독과 관련한 모임이 생겨나고 있는데, 꼭 전문가가 아니라도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과 소통하고 그 속에서 보살핌을 받으면 치유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자존감을 갖고 진짜 ‘나’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