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맑음. 입술.#89 Duke Ellington ‘A Slip of the Lip(Can Sink a Ship)’(1942년)
전설적인 재즈 음악가 듀크 엘링턴(1899∼1974)은 말했다. “세상엔 두 가지 음악이 있다”고. 듀크 엘링턴 홈페이지
요즘엔 남자도 입술이 예뻐야 한다고들 했다. 귀찮아서 입술용 크림을 안 발랐더니 최근의 내 입술이 거칠다. 날마다 많은 입술을 본다. TV를 켜면 매일 수많은 입술이 살아 움직이는 게 보인다. 요즘 TV에서 하는 연말 가요 축제도 마찬가지다. 바쁜 입술들 사이에서 실제로 노래가 흘러나오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립싱크 탓이다. 녹음된 노래를 틀어 놓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것 말이다. 이건 신기술도 아니다. 1980년대부터 있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도 립싱크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어려서부터 봐 온 TV 속 립싱크는 별로 불편한 볼거리도 아니다. 그게 없었다면 아이돌 댄스 그룹이 이끈 세계적인 케이팝 신드롬과 국위 선양이 가능이나 했을까.
‘나는 가수다’가, ‘K팝 스타’가, ‘히든 싱어’가 요즘 시청자들 입술을 바짝 마르게 하는 건 제 기능을 다하는 입술이 거세돼 가는 시대에 대한 반작용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요즘, 2004년부터 국내외 신선한 음악인의 라이브 무대를 소개해 온 EBS TV ‘스페이스 공감’의 공연 횟수와 제작진이 내년부터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까지 들려온다.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제 기능을 하는 입술은 찬밥만 먹는다. 우리 조카도 사람 입술이 노래를 아주 많이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신체기관이라는 것쯤은 알았으면 좋겠다.
음정이 불안하고 목소리가 갈라져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가슴 깊은 곳에서 방아쇠를 당긴 듯 터져 나오는 실시간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싶다. 노래하는 입술을 더 많이 보고 싶다. 그냥 예쁘기만 한 입술 말고.
오늘도 입술들은 바쁘다. 뽀뽀랑 ‘예’만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 그 입술들. 우리, 입술에 침 좀 묻히고 가실게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