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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노래하는 입술을 더 많이 보고 싶다… 그냥 예쁜 입술 말고

입력 | 2013-12-30 03:00:00

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맑음. 입술.
#89 Duke Ellington ‘A Slip of the Lip(Can Sink a Ship)’(1942년)




전설적인 재즈 음악가 듀크 엘링턴(1899∼1974)은 말했다. “세상엔 두 가지 음악이 있다”고. 듀크 엘링턴 홈페이지

입술의 시대다.

요즘엔 남자도 입술이 예뻐야 한다고들 했다. 귀찮아서 입술용 크림을 안 발랐더니 최근의 내 입술이 거칠다. 날마다 많은 입술을 본다. TV를 켜면 매일 수많은 입술이 살아 움직이는 게 보인다. 요즘 TV에서 하는 연말 가요 축제도 마찬가지다. 바쁜 입술들 사이에서 실제로 노래가 흘러나오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립싱크 탓이다. 녹음된 노래를 틀어 놓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것 말이다. 이건 신기술도 아니다. 1980년대부터 있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도 립싱크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어려서부터 봐 온 TV 속 립싱크는 별로 불편한 볼거리도 아니다. 그게 없었다면 아이돌 댄스 그룹이 이끈 세계적인 케이팝 신드롬과 국위 선양이 가능이나 했을까.

근데 한 해 동안 국가적으로 사랑받은 노래와 가수를 한데 모아 여는 잔치에서까지 맥없이 달싹대는 입술들만 보고 있자니 입술이 마른다. 물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단시간에 소화해야 하는 TV 제작 여건상 피하기 힘든 유혹도 있겠다. 뭐, 그래미 시상식도 아니니까. 이왕 매끄러운 진행을 원한다면 아예 모두를 립싱크하게 하든가. 어떤 가수는 직접 부르고 어떤 가수는 입술만 달싹이니 불공평하기까지 하다.

‘나는 가수다’가, ‘K팝 스타’가, ‘히든 싱어’가 요즘 시청자들 입술을 바짝 마르게 하는 건 제 기능을 다하는 입술이 거세돼 가는 시대에 대한 반작용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요즘, 2004년부터 국내외 신선한 음악인의 라이브 무대를 소개해 온 EBS TV ‘스페이스 공감’의 공연 횟수와 제작진이 내년부터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까지 들려온다.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제 기능을 하는 입술은 찬밥만 먹는다. 우리 조카도 사람 입술이 노래를 아주 많이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신체기관이라는 것쯤은 알았으면 좋겠다.

음정이 불안하고 목소리가 갈라져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가슴 깊은 곳에서 방아쇠를 당긴 듯 터져 나오는 실시간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싶다. 노래하는 입술을 더 많이 보고 싶다. 그냥 예쁘기만 한 입술 말고.

오늘도 입술들은 바쁘다. 뽀뽀랑 ‘예’만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 그 입술들. 우리, 입술에 침 좀 묻히고 가실게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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