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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승건]말보다 강한 글 한 줄

입력 | 2013-12-31 03:00:00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2년 전 일본 호스티스의 자서전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생후 22개월 때 수막염을 앓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여성이 도쿄 긴자 클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호스티스가 될 수 있었던 사연이 담겨 있다. 비결은 필담이었다. 그가 사례로 든 내용에는 이런 게 있다. 경영이 어려워진 회사 대표가 ‘신(辛)’이라는 글자만 쓰곤 괴로운 듯 술만 마시자 신(辛) 자 위에 선 하나를 더해 보여줬다는 것. ‘괴로울 신’에 줄 하나만 더하면 ‘행복할 행(幸)’으로 바뀔 수 있으니 당장은 힘들어도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기운을 내라는 뜻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감동을 받은 고객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글을 남기고 돌아갔다.

미모의 20대 여성과 고작 필담을 하기 위해 엄청난 술값을 내는 손님이 많다는 건 보통 사람들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대목은 그가 책에 쓴 대로 “말로 하기 힘든 내용도 글로 옮기면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자 민경익 씨도 저서 ‘기적의 쪽지 대화법’에서 글의 매력을 강조했다.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할 때 전화나 말보다 쪽지에 적은 글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프로배구 삼성화재 주장 고희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자기소개 화면에는 “뭉쳐라, 팀워크는 모두를 춤추게 만든다. 버텨라, 기회는 오고 상대는 무너진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는 “감독님이 평소에 자주 하시는 말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은 매주 월요일 선수들에게 주간 훈련 계획서를 나눠주면서 ‘좋은 구절’을 적은 A4 용지를 덧붙인다. 여기에는 전무급 대우를 받는 그가 삼성경제연구소나 제일기획 등 계열사들이 보내 준 트렌드 연구 자료를 비롯해 책이나 신문 등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발췌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고희진이 올려놓은 문구는 이런 여러 글들이 시간을 거쳐 압축되고 정리된 것이다. 고희진은 “지금까지 모아 둔 것만 해도 백과사전 두께다. 받은 글은 1주일 동안 벽에 붙여 놓는다. 경기에서 졌을 때, 나태해졌을 때 그걸 보고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말했다.

신 감독이 이런 일을 일찌감치 시작한 것은 말로만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대화를 하려면 작정하고 해야 한다. 따로 만나 오랜 시간 상담을 하든가 술자리를 만들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는 게 좋다. 지나가는 말로 아무리 얘기해봤자 ‘네’ 대답 한 번 하고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지도자가 말이 많을 필요는 없다. 그 일을 하면서 글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꼈다. 선수들이 한 번만 읽었어도 종이 값은 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시즌까지 6년 연속 우승을 달성한 삼성화재는 올 시즌에도 예상을 깨고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선수들 머릿속에 아로새겨진 글 한 줄의 힘도 있을 것이다.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