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1922∼2004)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부(賦)란 ‘시경’에 유래를 둔 한문학 장르의 하나로서 원래는 ‘눈앞의 경치나 사물을 아름답게 펼쳐 보이는 데 뜻을 둔 표현 방법’이다. 영시(英詩)의 ‘오드(ode)’에 해당한다.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란 구절로 유명한 셸리의 시 ‘서풍부’는 원제목이 ‘Ode to the west wind’다. 현대의 ‘부’는 풍유(諷諭)를 바탕으로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서정적으로 읊은 시일 테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리듬감이 굉장하다! 꽃, 눈물, 복사꽃, 환한 햇빛, 풀냄새가 출렁거리는 리듬에 풀풀 날리며 감각을 혼미할 정도로 흔든다. 이 리듬감과 감각적 이미지가 청년 서정주를 바로 연상시킨다. 한국 시단의 한 극단에 서정주(탐미주의)가 있다면 다른 한 극단에는 김춘수(무의미 시)가 있다. 김춘수는 개인의 감정이나 주관의 표출을 배제하고 순수한 추상과 관념에 몰두하는 시인 아니던가? 그런데 ‘서풍부’는 독자의 가슴을 덩달아 안달스럽게 만들 만치 탐미적이고 관능적이다.
서풍, 하늬바람은 가을바람이다. 가을바람이 복사꽃을 울려놓는다니…. 복사꽃이라는 게 ‘핑크 감성’ 아닌가? 이 시는 사랑의 시다. 제목에 ‘서풍’이란 말이 들어 있긴 하지만 서풍에 자기 마음을 가탁해서 사랑의 감정을 그렸다. 잃어버린 사랑이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상의 사랑이든. 많은 김춘수의 시편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독자를 아름다운 감각으로 아스라이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