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그런데… 눈물이 난다
강원 삼척군 북평읍 용정리 ‘100호 사택’(현 동해시 용정동 동부메탈 사택) 앞에 선 김진선. 김진선은 이곳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세상 구김살 없이’ 꿈처럼 살았다. 사택 뒷자락엔 두타산과 청옥산이 병풍처럼 우뚝 서있고, 앞섶엔 푸른 동해바다가 넘실거렸다. 그렇다. 김진선을 키운 건 팔할이 북평의 산과 바다 그리고 100호 사택의 너른 앞뜰이었다. 동해=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오랜 병마에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 쭈그리고 앉아 아들을 배웅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동구 밖 모퉁이를 돌 때까지 하염없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김진선도 그걸 알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도 눈물이 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가 태어나 자랐던 삼척군 북평읍 용정마을 ‘100호 사택’(현재 동해시 용정동 동부메탈 사택)과도 이별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병을 앓았다. 일종의 해소병(기관지 천식)이었는데 산후조리를 잘못한 탓이라고 했다. 평생 그렇게 사시다가 1967년 쉰둘에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형과 나 그리고 남동생은 밥, 반찬과 빨래도 하고, 급할 땐 어머니 주사도 놓아드렸다. 막내 여동생은 그러기엔 너무 어렸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난다. 난 딱 두 번 어머니 등에 업힌 기억이 있는데, 한번은 1951년 1·4후퇴 때 피란 나갔다가 큰댁이 있는 삼척군 근덕면 맹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어머니 등에서 포대기를 들춰 밖을 보니 목화솜 같은 눈이 펑펑 흩날리고 있었다. 또 한번은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진눈깨비가 엄청 쏟아졌는데, 누가 앞쪽에서 ‘진선아!’ 하고 불렀다. 마중 나온 엄마였다. 엄마는 ‘업혀라!’며 나를 포대기로 감쌌다. 아, 그 따뜻했던 엄마의 체온, 내 평생 그렇게 행복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임종 때도 ‘진선아, 진선아!’ 자꾸 내 이름만 불렀다.”
북평중을 졸업한 김진선은 당시 지방명문이었던 강릉상고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다닐 수가 없었다. 3등 안에 들었어야 장학금을 받았을 텐데 그게 물거품이 된 것이다. 어쩌면 당시 이정순 영어선생님이 없었다면 영영 학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 선생님은 “학업은 결코 중단하면 안 된다”며 한 달 치 봉급을 기꺼이 털어 그를 북평고에 다니도록 해주었다. 2851원! 바로 그가 평생 억만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소중한 돈 액수’이다.
50년 단골 강원 동해시 광신칼국수집에서 후루룩.
“본능적으로 왠지 그렇게 나 자신을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도를 닦았다고나 할까. 자신을 단련해 보려는 의지에서랄까. 어쨌든 성취감 같은 것을 적잖이 느꼈다. 밤새 계곡물소리를 한번 들어보라. 그 소리는 별별 이상야릇하고, 신비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졸졸∼ 찔찔∼ 동동∼ 구룩꾸룩∼ 쭉쭉∼ 또또록…. 그런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웬만한 일엔 쉽게 호들갑 떨지 않는다. 엄청난 충격과 쇼크도 느릿느릿 곰삭아서 다가온다. 나의 강한 집중력과 목표 지향적인 성격이 그때 길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재수생활과 군대를 마친 후 대학에 들어가 4학년(1974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렇다. 김진선은 소처럼 우직하다. ‘원칙과 정직’이라는 화두를 잡고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스타일이다. 누가 뭐래든 혼자서 묵묵히 ‘바늘로 우물을 팔 뿐’이다. 3수 끝에 겨울올림픽 유치를 한 것도 다 그런 힘이 밑바탕이 됐다. 그는 미신이 아니라 ‘사람의 정성’을 믿는다. 절박함과 간절함이 하늘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1998년 강원지사 선거에 나설 때 태백산 천제단에 가서 기도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그는 그 이후에도 매년 정초에 ‘국태민안 도태민안’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종교와 종파를 넘나들며 절실히 겨울올림픽 유치기도를 드렸다. 우리나라 불교의 5대 적멸보궁(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과 개신교, 천주교 성지 등은 물론이고 해외에 나가면 그 도시의 대표적 종교시설(성당, 불교 사원, 교회, 이슬람 사원, 러시아정교회 사원)에 가서 절실하게 기도했다. 가톨릭 세계 3대 성모발현 성지(포르투갈 파티마성당, 프랑스 루르드성당, 멕시코 과달루페성당)도 빼놓지 않았다. 두 번이나 올림픽 유치에 실패했을 땐 스스로 ‘내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 바쁜 와중에 무박 당일치기로 기독교 예루살렘성지를 다녀오기도 했다.
김진선은 미식(美食) 같은 것을 모른다. 그는 짜장면, 기계국수, 찐빵, 감자, 칼국수, 된장이나 김치찌개류 같은 것들만 좋아한다. 직원들이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영양실조 걸린다”며 피하는 이유다. 그는 요즘도 고향에 가면 맨 먼저 고교 때부터 단골로 다녔던 광신칼국수(033-532-4249)집부터 들른다. 정말 꿀처럼 맛있게 먹는다. 그렇다. 김진선은 누가 뭐래도 ‘영락없는 강원도 촌놈’이다.
▼ 아버지의 웅숭깊은 사랑 ▼
베트남 주둔지로 날아든 편지 한통, 발신인은 아.버.지.
베트남 냐짱(나트랑)모래밭에 ‘아버지’라고 쓰고 그리워하는 김진선. 김진선 위원장 제공
김진선은 그런 아버지에게 상의도 없이 베트남전에 자원했다. 형님한테 뒷수습을 맡기고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나중에 베트남에 도착해서야 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얼마나 놀랐을까.
1년 뒤 귀국해서 보니 아버지 얼굴이 ‘폭삭’ 늙어있었다.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형과 내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재혼’을 권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절대 그럴 수 없다’며 한사코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때 우리는 ‘그러시다면…’ 하며 순순히 물러섰다. 그런데 내가 나이 먹어보니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가 눈감으셨을 때 아버지 연세가 혈기 방장한 오십대 중반이었는데 어린 우리는 아버지를 노인으로만 생각했다. ‘자식들한테 짐이 될까봐’ 그런 거였는데 그걸 우리는 몰랐다. 요즘도 그 생각만 하면 내가 얼마나 불효자식인지 후회막급이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버지는 1979년 내가 결혼한 몇 개월 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평소 심장쇼크가 있었는데 그것도 자식들에게 숨기신 거였다. 아버지는 서울의 내 신접 셋방에 오셔서 두 밤을 지냈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천도복숭아를 잔뜩 사오셨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고향에 내려가신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가 뼈저리게 그립고 존경스럽다.”
김진선은…
▽저서 △지방의 비전과 도전(2006년) △새 농어촌 건설운동(2006년) △사진집 ‘소’(2008년) △이야기국가론(2010년)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