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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大韓의 회사를 만들라, 皇命이다”

입력 | 2014-01-04 03:00:00

근현대사 풍파 이겨낸 한국의 100년 기업들




광장시장 ‘어제와 오늘’ 1940년대로 추정되는 광장시장의 모습(왼쪽 사진). 상점 앞에 물건이 많이 쌓여 있지만 한가로운 분위기다. 3일 오후 광장시장은 물건을 구입하거나 음식을 사 먹는 인파로 가득 찼다. 광장주식회사 제공·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대한의, 대한을 위한, 대한에 의한 시장을 만들라.’

1904년 덕수궁 중명전. 대한제국 황제 고종(1852∼1919)은 궁내부 특진관(황제 자문관) 김종한(1844∼1932)을 찾았다.

“부르셨사옵니까.”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화폐개혁을 한다지 않소. 대한제국의 경제 주권을 손에 쥐고 흔들겠다는 농간이 아니겠는가.”

황제의 목소리는 노기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탕금(內帑金·임금의 개인 비자금)을 꺼내 줄 터이니 대한제국 상인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드시오. 장소는 배오개다리 근처(현재 서울 종로구 예지동)가 좋겠소. 남대문과 명동은 이미 일본인들이 장악하지 않았는가.”

김종한이 대답했다.

“신(臣), 내년 장마가 오기 전까지 황명(皇命)을 완수하겠습니다.”

대한제국 최초의 상설 시장이자 주식회사인 광장시장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황명을 받든 김종한은 수개월의 준비 끝에 1905년 7월 5일 시장 문을 열었다. 당시 국내 상인들은 조선 말기까지 널리 쓰이던 백동화를 없애고 일본 엔화만을 화폐로 인정하겠다는 일제의 화폐정리사업으로 갖고 있던 어음이 휴지 조각이 된 상태였다. 명동과 남대문 상권을 장악한 일본 상인들은 이를 계기로 종로 상권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광장시장은 당시 어려움에 처한 조선 상인들에게 최후의 보루였다.

광장시장이 올해로 설립 109주년을 맞는다. 광장시장과 함께 출범한 점포 임대 업체 ‘광장주식회사’가 여전히 시장을 관리하고 있다.

기업의 부침(浮沈)이 심한 한국에서 100년 이상 지속된 장수 기업은 아주 드물다. 2014년 1월 3일 현재 광장주식회사를 비롯해 두산그룹(1896년), 동화약품(1897년), 신한은행(조흥은행과 합병·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이 전신), 우리은행(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 전신), 몽고식품(1905년) 등 6곳에 불과하다. 국내 30대 그룹 중에서는 두산그룹이 유일하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해 12월 30일 장수 기업 사례를 모은 책 ‘천년을 꿈꾸는 사람들’을 펴내며 물질적인 가치보다 신용과 신뢰, 투자와 교육 등 100년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기업 장수의 비결이라고 분석했다.

동아일보는 청마(靑馬)의 해, 한국 경제의 힘찬 도약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장수 기업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송호식 광장주식회사 회장(64)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광장시장의 변천사 속에 녹아든 장수 기업들의 연결 고리를 소개했다.

장수 기업들이 일업백년(一業百年)으로 한국 현대사의 거친 풍파를 견뎌 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또 광장시장과 궤를 같이한 기업들은 서로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영속을 갈망하는 지금의 기업인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109년 전인 1905년(광장주식회사 설립 연도)으로 시간을 돌려 보자. 》  

“내탕금을 내주겠다” 광장시장에 자본주의 싹 틔우다 ▼

한국 자본주의 1번지 광장시장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광장시장은 1959년 3층 건물로 새로 태어났다. 새로 지어진 광장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왼쪽 위 사진 2장)과 광장주식회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1970년대 모습(왼쪽 아래 사진). 광장시장 한복 상가의 최근 모습(오른쪽 사진). 광장주식회사 제공·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작가 김종광 씨가 쓴 ‘광장시장 이야기’에 따르면 광장시장은 설립 당시 시장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모으기 위해 주식을 발행했다. 주당 50원씩 총 1600주였다. 주식의 80%는 양반들이 사들였지만 이후 평민 주주들이 주식을 꾸준히 매입해 1912년에는 평민 주주의 주식 보유 비율이 80%까지 높아졌다.

지분이 높아진 평민들은 경영진을 교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장시장을 설립한 뒤 사장 자리에 앉은 김종한이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 친일파 이완용이 조직한 친일단체 정우회(政友會) 총재를 맡는 등 친일 행각을 벌였기 때문이다.

1912년 1월 주주총회에서 두산그룹 창업주인 박승직(1864∼1950)이 광장시장의 새 사장으로 선임됐다. 평민 주주들이 힘을 모아 김종한을 몰아내고 광장시장의 첫 평민 출신 사장을 옹립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 경제사에서 주주들이 경영권을 행사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박승직은 1920년까지 광장시장의 초석을 닦은 뒤 개인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평민 실업가 김한규에게 사장 자리를 넘겨줬다.

광장시장은 1945년 광복을 맞아 도약기를 맞는 듯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암흑기에 접어든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광장시장은 폐허가 됐다. 상점들이 들어선 기와집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광장시장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떠났던 난민들이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시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광장시장은 생활필수품과 군용물자, 외제 물건의 암거래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시장은 빠른 속도로 제 모습을 찾아 갔다.

1953년 휴전 협정 후 이승만 대통령은 광장시장을 비롯한 서울 주요 시장의 재건을 지시했다. 전쟁을 겪은 국민에게 생필품을 원활하게 지급하기 위해선 시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울시는 남대문시장과 광장시장을 신식 건물로 다시 세우는 공사를 시작했다. 1953년부터 7년에 걸쳐 이뤄진 초대형 공사였다.

현재 광장시장의 뼈대를 이루는 총면적 1만9000m²(약 5747평) 규모의 3층 건물은 이때 지어졌다. 건설 작업은 총 3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1955년까지 건물 1층이 지어진 데 이어 1956년 2층 건물이 올라갔다. 이후 대규모 3차 공사를 통해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우여곡절 겪으며 꿋꿋이 성업

광장시장 재건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1950년대 광장시장을 주름잡던 ‘정치 깡패’ 이정재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이정재는 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벌어져도 가게를 지키겠다며 피란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다. 북한군에게 잡혀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이정재는 1953년 8월 출범한 ‘동대문시장 재건위원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대통령경호실장이던 곽영주는 고향(경기 이천) 후배인 이정재에게 힘을 실어 줬다. 이정재는 ‘동대문의 왕’으로 불릴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광장시장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재건된 후에는 분양금을 크게 올려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이정재는 1960년 4·19혁명과 함께 몰락했다. 동아일보는 1960년 5월 9일자 기사를 통해 ‘이정재 왕국’의 부조리를 낱낱이 밝혔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정재 일파가 장악한 상인연합회와 납세조합은 상인들에게 청소비 명목으로 거액의 징수금을 뜯어내기도 했다. 자유당 시절 정치자금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정재는 1961년 5·16군사정변 때 체포된 뒤 혁명재판이 열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19일 서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광장시장은 그 후로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1966년에는 완구점에서 큰불이 나 150여 개의 점포가 소실됐다. 기존 상인들과 새로 들어온 노점상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점포만 1598개에 이르는 등 크게 번성했다. 광장시장 3층 ‘광장카바레’(2004년 폐업)는 연일 대성황을 이뤘다. 1982년 야간 통금이 전면 해제되자 새벽시장까지 들어섰다. 1983년 중고교생 복장 자율화로 청소년 고객들까지 광장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도 광장시장은 슬기롭게 이겨 냈다.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운동과 함께 중고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을 노린 것이다. 한때 점포의 절반 이상이 가게를 접었지만 외환위기가 진정된 후에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2006년에는 종로구가 관광특구로 지정해 내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광장주식회사 건물 안에는 1200여 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다. 점포들은 크게 한복, 청과, 침구, 구제 의류 등으로 나눠진다. 1층에는 과일을 비롯해 생선, 떡 등 각종 식품가게와 직물가게 등이 입점해 있다. 2층은 한복가게가 주를 이룬다. 2층 서쪽 일부에 수입 구제 가게가 있다.


한국 최고(最古) 기업 두산그룹

1999년 서울 을지로6가에 문을 연 패션쇼핑몰 두산타워. 두산은 그룹의 시초인 박승직상점 터에서 1.5km 떨어진 자리에 두산타워를 세웠다. 두산그룹 제공

초창기 광장시장 성장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박승직은 국내 최장수 기업인 두산그룹의 밑바탕을 그렸다. 1896년 ‘박승직상점’을 개설한 그는 보부상 출신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돈을 벌었다.

박승직의 장남인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은 광복 후인 1946년 박승직상점을 이어받았다. 박 회장은 1951년 박승직상점을 두산상회(현 두산글로넷)로 바꾸고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현재 이곳에는 두산아트센터가 들어서 있다. 박 회장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쇼와(昭和)기린맥주회사를 1952년 인수해 동양맥주를 설립했다. 1953년에는 두산상회 상호를 두산산업으로 바꿔 무역업에 나섰다. 이후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한양식품 등을 잇달아 설립하면서 소비재와 무역, 건설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두산그룹은 1996년 창업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한국네슬레, 한국3M, 한국코닥 지분과 OB맥주 영등포공장을 매각했다. 1997년에는 음료사업, 1998년에는 주력 사업인 OB맥주와 서울 을지로 본사 사옥을 팔았다. 두산은 선제적 구조조정으로 넉넉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997년 외환위기로 국내 유수의 기업들이 쓰러지는 가운데서도 풍파를 피할 수 있었다.

두산은 외환위기 이후 새 성장 동력 찾기에 나섰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를 시작으로 2003년 고려산업개발,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잇달아 인수해 중공업 분야를 강화했다. 소형 건설 장비 전문회사인 미국 밥캣 등 외국 회사도 인수해 종합 중공업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박승직상점이 있던 자리에는 1996년 8월 두산그룹 창업 100주년 기념탑이 들어섰다. 탑 아래에는 두산 200주년인 2096년 8월에 공개될 타임캡슐이 묻혀 있다. 타임캡슐 안에는 박승직상점에서 두산그룹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와 물품이 들어 있다. 종로4가 인근 동대문에는 1998년 대형 패션몰 ‘두산타워’를 준공했다. 두산타워는 포목점이던 박승직상점의 명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두산그룹의 슬로건은 ‘사람이 미래다’이다. 그룹 관계자는 “박승직상점 때부터 두산은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면서 “인재를 중시했던 창업자의 신념이 국내 최장수 기업의 입지를 갖추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고종이 마시던 ‘활명수’

국내 최장수 제약회사인 동화약품은 부채 모양이 그려진 소화제 ‘활명수(活命水)’로 유명하다. 활명수는 국내 최초의 양약이다.

고종 황제의 선전관(비서 및 경호 담당)이던 민병호는 소화불량에 좋다는 궁중 비방에 양약 처방을 섞어 신식 소화제를 개발했다. 탕제처럼 달여 먹을 필요가 없었던 활명수는 급체나 토사곽란(토하고 설사하면서 배가 아픈 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던 대한제국 말기에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다.  

▼ ‘박승직상점’의 한 세기… 포목점서 대형패션몰로 ▼

동화약품 ‘활명수’의 초창기 제품(위 사진 왼쪽)과 1968년 제품. ‘몽고간장’으로 유명한 몽고장유공업사의 1950년대 공장(아래 사진). 동화약품·몽고식품 제공

민병호는 1897년 장남 민강과 함께 ‘동화약방’을 창업해 활명수와 몇몇 약제를 만들어 팔았다. 동화약방은 국내 최초의 제조회사 및 제약회사이면서, 국내 최초의 등록상품(활명수)·등록상표(부채표·1910년)를 보유한 기업이다. 사명인 ‘동화(同和)’는 화합과 부국의 뜻을 담은 주역(周易) 구절에서 딴 것으로 ‘민족이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창립 이념을 담은 것이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민강 사장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복역하기도 했다. 석방 후 건강이 악화된 민 사장은 1931년 세상을 떠났다. 사장을 잃은 동화약방은 경영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친인척 몇 명이 차례로 사장을 맡았지만 기울어 가는 사세를 돌려놓지 못했다.

민씨 문중은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펼치던 민족사업가 윤창식 선생에게 회사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1937년 동화약방을 인수한 윤 선생이 우수 인력을 영입하고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면서 다시 정상 궤도로 올라섰다.

동화약방은 1930년대 해외로 진출했다. 전시체제였던 당시 국내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중국 만주 지역에 활명수를 내다 팔았다. 만주 지역에 지점을 열면서 국내 1호 여성 약사인 장금산 씨를 지점장으로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내고 만주 현지 생산까지 진행했다.

동화약방은 독립과 분단,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굴곡의 현대사마다 고비를 맞았다. 광복 후 북쪽을 소련군이 장악하자 북한 쪽 거래처가 날아가 버렸다. 만주 공장도 포기해야 했다. 동화약품은 전쟁으로 공장 건물이 파괴된 상황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에 의약품을 공급하기 위해 공장을 옮겨 가면서 생산을 계속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서울 생산 공장을 버리고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 임시 공장을 만들고 약품을 팔았다.

동화약방은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나서야 서울로 돌아와 옛 명성을 되찾았다. 수차례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윤 사장은 1962년 사명을 동화약방에서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바꾸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910년대부터 활명수의 유사 상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동화약품은 품질 개선으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탄산가스를 첨가해 청량감을 더한 ‘까스활명수’와 상처치료제 ‘후시딘’, 감기약 ‘판콜’ 같은 히트 제품도 계속 선보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부채표가 없으면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광고를 내세워 브랜드 차별화에도 힘썼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제약 한 분야에만 집중해 온 게 장수 비결”이라면서 “앞으로는 전문의약품 분야를 강화해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응사’에 등장한 ‘마산 3대 부자’ 몽고간장

“몽고간장, 무학소주, 시민극장. 마산 돈은 이 ‘오빠야’들이 다 쥐고 있는 기라.”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케이블TV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한 대목이다. ‘마산 3대 부자’의 자제들이 서울 여대생들과의 미팅 자리에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은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당시 셋 중 누가 가장 부자였는지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다만 가장 오랜 시간 부(富)를 쌓아 온 곳이 100년 넘게 가업을 이어 온 몽고간장임은 분명하다.

몽고간장은 광장주식회사와 함께 올해 창립 109주년이 된다. 현재 몽고간장의 제조업체는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김홍구 초대 회장(1914∼1971)의 장남 김만식 몽고식품 회장과 차남 김복식 몽고장유 대표가 각각 몽고간장을 만들고 있다.

1931년 당시 17세였던 고 김 회장은 일본인 야마다 노부스케(山田信助)가 세운 야마다장유공장에 간장 배달원으로 들어가 일하다 성실한 태도로 신임을 얻어 간장 만드는 법을 배웠다. 1935년에는 2인자 격인 공장지배인이 됐다.

1945년 광복 후 야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공장을 매입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에는 회사 이름을 ‘몽고장유공업사’로 바꿨다. 1959년에는 당시 광장시장과 함께 종로 상권을 양분하던 낙원시장에 직영 영업소를 개설했다.  

▼ “돌탑 쌓듯 신뢰 쌓아… 200년 기업으로 키워갑니다” ▼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종로구 예지동 광장시장에서 만난 송호식 광장주식회사 회장(오른쪽)이 광장시장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한 여성 상인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971년 고 김 회장이 타계한 이듬해 장남 김만식 회장이 가업을 승계했다. 차남 김복식 대표는 같은 해 몽고간장의 유통사인 몽고유통을 설립했다. 김복식 대표는 1973년 경기 부천시에 설립된 몽고간장 제2공장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몽고장유를 세워 독립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형은 영호남과 제주 지역에서 ‘마산몽고간장’, 동생은 서울·경기 지역에서 ‘서울몽고간장’이란 상호를 내걸었다.

형제는 상표권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50부는 2012년 8월 김만식 회장이 동생을 상대로 ‘몽고간장’의 상표 사용을 금지해 달라고 낸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형제가 사이좋게 상표를 나눠 쓰라는 게 판결의 요지였다.

법정 소송까지 이어졌지만 사실 두 형제의 관계는 원수지간이라기보다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수준이라는 게 줄곧 이들을 지켜본 식품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생전 무엇보다 가정의 화목을 강조해 온 선대 회장의 가풍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돌탑에 돌 하나 더 쌓아올리듯


“하루하루 맡은 일을 하다 보면 또 200년이 되어 있겠죠.”

나긋나긋한 말투로 광장시장과 장수 기업들의 역사를 설명하던 송호식 광장주식회사 회장은 앞으로의 전망을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광장주식회사는 한성은행(조흥은행) 은행장이던 김한규 일가가 1976년까지 경영했다. 이후 광장주식회사 대주주가 된 송학순 회장(1915∼1999)이 새 대표이사로 올라섰다. 송 회장의 조부 송우영은 광장주식회사 출범 당시부터 주주로 참여했다. 송 회장의 차남인 송호식 현 회장은 광장주식회사 상무로 입사했다.

송 회장은 일업백년의 원동력이 “한 우물만 파면서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신뢰를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100년이 넘은 회사인데 무작정 수익만 좇아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있어요. 다른 회사들이 창업주 2세, 3세가 기업을 물려받으면서 무너지는 이유도 사업을 크게 확장하다가 무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돌탑에 돌 하나 더 쌓아올리는 심정으로 묵묵히 하던 일을 할 뿐이에요.”

시장의 또 다른 주인인 상인과의 신뢰도 강조했다. 송 회장은 “상인들의 보증금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면서 “외환위기 때 점포가 600개 정도 순식간에 빠져나갔는데 보증금을 나가는 날 정확히 입금해 줬다”고 회상했다. 그때 쌓인 신뢰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송 회장은 “내 역할은 시장을 잘 지켜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선친께서 강조한 부분이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고, 시장은 시장다워야 한다’는 점이다”며 “옷도 팔고 생선 비린내도 나는 지금의 광장시장 모습 그대로를 이어 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경영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도 꿈은 있다. 한때 광장시장 건물 2층을 가득 채웠던 한복상점이 다시 호황을 누리는 것이다.

송 회장은 “국민의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 언젠가 다시 우리 고유의 것을 찾을 때가 온다”며 “역사적인 사명의식을 가진 상인들과 함께 시장의 역사를 이어 가면 언젠가 사람들이 다시 한복을 찾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광장시장은 1959년 신축 건물이 완공된 후 줄곧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간 재개발의 압력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송 회장은 “으리으리한 건물을 짓고 분양비를 챙기면 부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을 모두 잃게 될 것”이라며 “광장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상인”임을 거듭 강조했다.


에필로그

지난해 12월 24일 성탄 전야. 세밑의 종로 거리는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박승직상점 옛터와 광장시장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시장은 이른 시간부터 상인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좌판시장 가마솥에서 피어나는 뭉클한 김과 노릇노릇한 녹두전의 고소한 냄새는 잔칫집을 연상하게 했다.

동대문 두산타워에는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연인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옷을 고르고 있었다. 몇몇은 제법 능숙하게 상인들과 흥정을 벌였다. 시장은 변함이 없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창업 후 100년을 넘은 기업은 미국 152개, 영국 41개, 독일 24개 등으로 조사됐다. 100년 기업이 6곳에 불과한 한국은 해외에 비해 장수 기업이 적다는 지적도 받는다. 하지만 식민통치와 전쟁을 거치면서 100년을 버텨 온 기업들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한국 100년 기업’의 장수 비결은 어쩌면 원론적이다. 주어진 일로 꾸준히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신뢰를 쌓는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조직학습센터 이사인 아리 드 호이스가 저서 ‘살아있는 100년의 기업’에서 지목한 장수 기업의 공통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장수 기업들은 △강한 정체성과 결속력을 바탕으로 △외부 환경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사업 관계인들에게 관대함을 유지하면서 △자금 조달에 보수적인 입장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의 장수와 번영을 바란다면 특정한 전략이나 아이디어보다 근본적인 원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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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주식회사가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한 1925년 1월 28일자 기사 한 토막을 소개한다. 신문은 그림을 잘 그리는 어린이 진공섭 군을 소개하면서 “진 군의 아버지는 형제를 벌어먹이시느라고 광장주식회사에 사무원으로 계시다”고 썼다.

광장시장 사람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지런히 일터와 집을 오갔다. 그 평범한 일상이 100년을 이어 갔다. 불성실하다는 평가를 받거나 다른 상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시장에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 또한 기업의 장수 비결과 마찬가지다. 물론 때로는 새 사업을 개척하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원칙은 그대로다. 시장은 변함이 없다.

이진석 gene@donga.com·강홍구·류원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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