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겠다니까 기자들이 묻는다 “정계복귀 하실 겁니까?”
동시통역사
화요일이었던 지난해 12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DJ) 전 대통령 묘소를 찾은 권노갑 고문. 그는 매주 화요일 묘소를 참배해왔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6개월 과정의 동시통역사 준비과정에 등록하고 싶다니까 이 원장은 대뜸 내게 영어로 물어봤다. 이 원장은 내 영어 답변을 듣더니 “그만하시면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본래는 6개월 과정이지만 3개월만 하시면 되겠습니다”하고 등록을 받아줬다.
동국대 경제학과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고, 그해 10월 부산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우연히 목포상고 선배인 박성국 씨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학년이 4년 위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목포상고 동기생이기도 했다. 당시 박 선배는 부산에 주둔해 있던 미 육군 제70수송대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박 선배의 소개로 미군부대에 들어가 3년간 통역관으로 일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반도호텔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던 ‘미국무역’에 근무했다. 월급도 한국 보통 회사원의 10배나 받았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있었고, 또 장가를 가라는 연로한 모친의 요청도 있고 해서 나는 고향인 목포로 내려갔고, 거기서 공개채용으로 목포여고 영어선생이 돼 5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하던 3공, 5공 시절에는 한국에 와 있던 외신기자들이나 미국 대사관에 한국의 정치탄압을 알리는 일을 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영어공부는 틈틈이 해온 편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좋고, 다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용한 수감생활은 오히려 영어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그래서 출감하자마자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첫 수업
첫날 양복을 입고 강의실에 들어가니 ‘통역대학원 왕기초반’ 수업에 참여한 50여 명의 수강생은 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통역대학원 진학이나 해외유학을 준비하는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손자, 손녀뻘의 수강생들은 처음엔 나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언론에서 이름을 많이 들어본 정치인이 자기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내가 한 번도 수업을 빼먹지 않고 착실히 공부하니 수강생들도 얼마 안 가서 나를 ‘고문님’ 또는 ‘어르신’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매주 학원에 가는 월·수·금요일이 기다려졌다.
공부하는 이유
내가 동시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영어학원에 등록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이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정말 동시통역사가 되실 생각입니까?”
찾아온 기자들이 그렇게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내가 그 속뜻을 알지. 내 실력에 무슨 통역사냐, 이거 아니오?”
내가 이렇게 반문하면 기자들이 웃는다.
“영어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미래의 필수라고 생각하고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계속 영자신문을 봐 왔지. 동시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한 다음에는 미래학이나 경제학을 더 공부해 보고 싶어.”
그러면 기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정치 이야기를 꺼낸다.
“정계로 복귀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이 나라 발전에 기여할 몫이 있다면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정치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은 없어. 정계개편 등 여러 가지 산적한 문제가 있음은 알고 있지만 다 잘되겠지. 현재 나의 첫 번째 과제는 공부이고, 그것이 내 목표야.”
내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착실히 공부하는 것을 본 이익훈 원장은 가는 곳마다 “정치인 중에서 이런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라고 내 칭찬을 한다고 한다.
그런 칭찬을 듣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삶의 길잡이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평소 신문은 사설뿐 아니라 만화와 광고까지 빼놓지 말고 보라고 늘 강조했는데, 이러한 가르침이 몸에 배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구치소에서 날마다 빗자루로 스윙연습을 하던 강신성일 의원은 자신의 건강지수가 50대 초반이라고 자랑했지만, 나는 내 정신적 건강지수야말로 50대 초반이라고 자부하고 싶기도 하다.
▼ 한국정치史의 기록, 권노갑 회고록 연재를 시작하며 ▼
“DJ 말 어긴것 딱 두번” 무슨 일 있었기에
정치, 역사학자 등 전문가 26명에게 최근 “회고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생존인물을 꼽아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일보가 ‘회고록-역사 법정의 최후 기록’이라는 특집을 마련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첫손가락에 꼽힌 인물은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였다. 다음이 전두환 전 대통령.
DJ(김대중)를 중시조로 하는 현 야권에서는 민주당의 권노갑 상임고문과 박지원 의원이 꼽혔다. 학자들은 박 의원에 대해서는 ‘정치를 떠난 다음에’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렇다면 현 야권에서 그런 단서를 충족시키면서 ‘지금’ 회고록을 집필해야할 ‘역사적 책무(?)’를 지닌 사람으론 권 고문만 남는다.
권노갑….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시대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권노갑 만큼 특별하고, 또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도 드물다. DJ 없는 권노갑도 있을 수 없지만, 권노갑 없는 DJ도 상상하기 힘들다. 이희호 여사가 아내이자 동지로서 50년 가까이 DJ와 동행(同行)했다면, 권노갑은 평생 동지로 DJ를 50년간 수행했다. 아니, 올해 여든넷의 권노갑은 지금도 DJ를 모시고 있다. 그는 2009년 8월 DJ가 서거한 이후 매주 화요일이면 동지들과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묘소를 찾고 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DJ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는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권노갑의 순명(順命)’이라고 했다. 그도 인정하듯 한국 정치사에 권노갑 같은 인물은 없었다. YS(김영삼)의 상도동계는 DJ의 동교동계와 함께 과거 민주화 진영의 양대 가문이었다. 하지만 상도동계엔 권노갑이 없다.
상도동계 대표로 권 고문과 함께 지난해 말 ‘민주와 평화를 위한 국민동행’을 출범시킨 김덕룡(DR) 공동대표는 “그런 동지를 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럽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할 때, DR는 아마 지난해 4월 이후 서울대병원에 장기입원 중인 YS를 떠올렸을 것이다.
권 고문은 지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꿈을 꾼다고 했다. “꿈에 자주 나타나요. 그런데 깨고 나면 마음이 아파요. 그냥 말을 들을 걸…. 그것 때문에 자주 나오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권노갑이 DJ의 말을 듣지 않은 때도 있었나. 권 고문은 “평생 딱 두 번 있었다”고 했다. 한 번은 2003년 ‘진승현 게이트’ 때이고, 또 한 번은 2008년 18대 총선 때 일이다. 공교롭게도 그 두 번 모두 민주당 박지원 의원과 관련된 일이었다.
권 고문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듬해인 1999년, DJ와의 40년 세월을 돌아보며 회고록을 출간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이전 세월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2008년 두 번째 회고록의 초고를 완성했다. ‘대통령 김대중’과 권노갑의 이야기다.
권 고문은 두 번째 회고록의 초고를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회고록, 특히 정치인의 회고록은 ‘일면적 진실’에 빠질 우려가 많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권노갑 회고록’을 텍스트로 소개하는 동시에 회고록 속의 주요 사건을 동아일보가 재구성해 각주(脚註·footnote)를 다는 방식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