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보다 국물 덜 흘러” 1930년대 들고 뛰어다녀… 1940년대 나무 배달가방→1970년대 철가방 등장
1940년대 제작된 나무 배달통. 짜장면박물관 제공
동아일보 1931년 1월 2일자 ‘직업별로 본 그 생활상’ 기사는 배달부를 소개하며 “다리 근로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이 배달부라 할 것이니 그중에는 우편, 신문, 음식 배달 등이 있다”고 썼다. 당시엔 마땅한 운반수단이 없어 배달원들이 음식을 들고 뛰어다녔다. “꼬불꼬불한 장안의 골목은 오직 그들의 전장”이었고 “다리에 병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공포”였다.
중국요리 배달 기록은 1936년 4월 14일자에 등장한다. ‘요리 배달이 자동차에 중상’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청요리(중국요리) 배달부가 우동을 배달하다 차에 치여 빈사 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업계의 해석에 따르면 중국요리 배달이 많았던 이유는 짜장면과 탕수육 등의 음식은 국물이 많은 한식보다 운반이 쉽다는 점에있다.
한현수 사장(34)은 “할아버지로부터 근처 공장 등으로 배달 나가던 일에 대해 들었다”며 “당시엔 전화가 없어 공장 직원이 와서 주문을 했고, 짜장면은 나무로 짠 가방에 넣어 자전거에 싣고 갔다고 한다”고 말했다.
1960 년대 이후 전화기가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중국음식 배달 서비스가 더욱 많아졌다. 여기에 1970년대 포장도로가 골목골목 깔리고 1980년대 들어 배달에 오토바이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배달 서비스가 일반화되고 배달 가능 범위도 넓어졌다.
이후 청소년들이 중국음식 배달부로 일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그 들의 오토바이 난폭 운전도 늘자 ‘청소년 이륜차 사고 증가’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철가방’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박창준 짜장면박물관장은 “나무는 무겁기도했고 음식물이 흘렀을 때 닦아내기 힘들어 지금의 철가방 형태가 탄생했다. 하지만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