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한 국내 PTSS 치료 실태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동작구 보라매병원 ‘경찰 트라우마 센터’에서 상담치료사가 영상 치료를 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① 병 있어도 불이익 받을까 ‘쉬쉬’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면 정밀 심리검사를 받는 데에만 한 번에 30만∼60만 원이 들어간다. 상담 치료 비용은 회당 4만∼10만 원 수준이다. 공무원 봉급에는 작지 않은 부담이다. 하지만 MIU 대부분은 진료비를 근무지에 청구하지 않았다.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8∼2012년 PTSS로 진단받은 경찰 및 소방 공무원은 169명이다. 하지만 공무원연금공단에 ‘공무상 요양(공상·공무 집행 중 얻은 질병이나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국가로부터 치료비 등을 지원받는 것)’을 신청해 치료비를 청구한 공무원은 20명(11.8%)뿐이었다. 이 가운데 공상으로 승인된 것은 16명이다. PTSS로 진료받은 MIU 대부분이 자신이 근무하는 기관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개인 비용으로 치료를 받았다는 뜻이다.
경찰과 소방관들이 정신과 치료비를 공무원연금공단에 청구하지 않은 이유는 정신과 진료 기록이 근무기관에 알려지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본보가 접촉한 MIU 20명 중 19명은 “트라우마에 대해 주변에 알리면 진급, 이직, 취업에 불이익을 겪을 것 같았다”고 응답했다. 이 중 10명은 주변 시선을 의식해 정신과 진료도 받지 못했다. 실제로 2010년 부산에서 우울증을 앓던 경찰관이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강희락 경찰청장은 “경찰에 들어와 병을 얻었어도 당사자한테 미안하지만 계속 끌고 갈 수는 없다. 정신질환이 심한 직원을 찾아내 직권 면직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언한 일도 있다. 경찰 관계자는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경찰관은 경찰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도 ‘PTSS 대신 가벼운 수면장애로만 기록해 달라’고 요청한 뒤 수면제만 타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999년 제1연평해전에 참전했던 박모 씨(41)가 14년간 환각을 떨쳐내지 못해 굿판까지 벌이면서도 정신과 치료는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정부의 트라우마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여실히 드러낸다. 당시 박 씨뿐만 아니라 부상자 7명은 제대로 된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했다.
10년 후 2009년 천안함 폭침 사건을 거치면서도 전투 생존자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천안함 생존 장병 58명은 동료들의 전사(戰死)를 목격한 직후부터 심리적 안정을 취할 여유도 없이 합동참모본부에서 나온 조사단으로부터 반복 조사를 받아야 했다. 생존 장병 이모 씨(24)는 “매일 저녁 진술서를 써서 제출해야 했다. 어떤 때는 1시간 단위로 진술하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사건 상황을 10분 단위로 자세히 진술하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동료들의 영결식을 치른 뒤 안치소에 남은 관(棺)을 직접 다른 부대에 반납하는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MIU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현장의 인식과 근무 여건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소방관들은 구조 활동 중 어린이나 동료가 사망하는 사고 등을 경험하면 ‘보건안전관리규정’에 따라 즉시 정신과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돼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인근에 상담소가 갖춰져 있는 소방서가 드물고,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직원들이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우고 병원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매뉴얼조차 지켜지지 않아 단순한 현장 업무가 심각한 트라우마 사건으로 악화되는 사례도 있다. 수난구조대원은 잠수 중 질소 마취로 인한 정신착란을 막기 위해 작업 전 신체 및 정신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2013년 7월 서울 노량진 배수지 수몰사고 당시 119구조대원 허모 소방장(44)은 이틀간 현장에 주차된 버스에서 쪽잠을 잔 뒤 잠수 작업에 투입됐다가 금세 죽을 것 같은 공포를 경험했다.
▼ MIU 대상 PTSS종합센터 국내엔 없어 ▼
당국 “인과관계 입증 어렵다”… 유공자 신청 131명중 33명만 인정
③ 허술한 보상 정책
하지만 보훈처에서는 “퇴직자만 공상공무원으로 등록할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공무원들이 재직 중 과잉 혜택을 받는다는 지적이 있어 2009년 2월 관련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박 소방교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다가 다쳤는데도 현직에 있을 때는 공상공무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심한 박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공무 중 트라우마를 겪어 퇴직한다고 해도 해당 사건과 정신질환의 관계를 입증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이모 씨(40)는 전투경찰로 복무 중이었던 1994년 시위대에 끌려가 머리를 크게 다치고 선임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해 PTSS가 생겼다. 18년간 정신과와 자택만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2012년에야 대법원까지 이어진 소송 끝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그에게는 최저 등급(7급)이 부여됐다. “오래된 일이라 인과관계 입증이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재 이 씨가 받는 지원금은 월 34만8000원이 전부다. 2008∼2012년 PTSS로 인해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한 131명 중 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33명(25.2%)뿐이었다.
④ 전문 시설 및 인력 턱없이 부족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사건사고를 일상처럼 경험하는 MIU 상당수는 당장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높은 PTSS 위험에 처해 있다. 2012년 경찰청이 전국 경찰 공무원 중 1만7311명을 특수건강진단 PTSS 검사지로 조사한 결과 5309명(30.7%)이 ‘PTSS 고위험군’(현재 PTSS를 앓고 있다는 뜻)에 해당했다. 소방 공무원은 응답자 3만2112명 중 4462명(13.9%)이 PTSS 위험군으로 진단됐다. 군 전체를 대상으로 한 PTSS 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겪어도 전문 상담기관과 상담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새누리당 성완종 의원이 보훈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보훈위탁병원 중 정신과 진료 병원은 60곳이었지만 PTSS 상담 및 치료가 가능한 곳은 17곳에 불과했다. 특히 약물 투여와 인지행동 치료(CBT), 각종 PTSS 전문 치료를 병행할 수 있는 곳은 2011년 서울중앙보훈병원에 개설된 PTSS 전문 클리닉이 유일했다.
MIU를 대상으로 PTSS 치료와 연구 등을 총괄하는 종합 센터는 국내에 아직 없다. 지난해 8월 서울 동작구 보라매병원에 ‘경찰 트라우마 센터’가 개설됐지만 이곳에서는 단순한 상담 치료만을 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MIU 20명 인터뷰 전문
<특별취재팀>
▽팀장 하종대 부국장
▽사회부 김상수 차장, 이성호 조건희 김성모 기자
▽국제부 박현진 뉴욕특파원 박희창 기자
▽사진부 변영욱 기자
▽정치부 정성택 기자
▽도움말 주신 분 채정호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교수(대한불안의학회 이사장) 박주언 계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상 검사지 결과 분석 및 자문 역할) 이강우 소방방재청 소방정책과 소방위, 권일용 경찰수사연수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