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의 일이다. 어느 주말 민소매 차림으로 아이들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의 양팔 겨드랑이 속의 시커먼 털을 본 네 살짜리 딸 쌍둥이 지우, 유나가 “으악 괴물이다∼”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익숙했던 아빠가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자신들에게는 없는 ‘털’이 무척이나 낯설고 이상하게 보였음에 틀림없으리라. 덩달아 일곱 살짜리 큰딸도 “아빠 이상해∼ 징그러워” 하며 품에 안겨 잘 놀다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신나게 놀던 아빠는 졸지에 시커멓고 털 난 무서운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빠 거부’가 잠깐의 해프닝이 아니라 그 뒤부터 아이들이 왠지 아빠를 멀리하고 슬슬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
이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세 딸들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엄마, 할머니, 이모님, 선생님 등 죄다 여자들뿐이고 남자라고는 아빠밖에 없다. 친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셔서 겨우 사진으로만 추억하고 있고 멀리 계시는 외할아버지랑 만날 일은 일 년에 몇 번 외갓집 놀러 갈 때뿐이니 늘상 함께하는 생활공간에서 남자라고는 찾을 수 없다. 동네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첫째 딸 보미의 유치원에도 버스운전사를 제외하면 담임, 부담임 선생님 모두가 여성이고 특기교육을 하는 분들도 체육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 선생님인 모양이다. 국공립 어린이집이라 통학버스가 아예 없어 남자 버스운전사조차도 없는 둘째 쌍둥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도 마찬가지. 여긴 체육활동도 여자 선생님께서 진행하시니 남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자=더럽다’ 혹은 ‘털=징그럽다’는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지 어설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우리 딸들에 대한 첫 번째 ‘아빠표 성교육’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면 우리 몸의 중요한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것으로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다 쓸모가 있는 소중한 우리 몸의 일부이다. 그리고 너희들도 어른이 되면 소중한 몸의 주요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털이 날 거다”라고 말했다. 곧 4세 쌍둥이들은 “보여줘∼ 보여줘∼” 하면서 아빠를 신체 탐험의 대상으로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만으로는 슬슬 피하는 아이들을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엄마처럼 깨끗하게 면도하시면 동생들이 다시 뽀뽀해 줄 거예요∼”라는 큰딸 보미의 조언에 따라 여성용 면도기를 활용해 아빠의 겨드랑이 털도 엄마처럼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사랑하는 딸들이 다시 아빠의 품에 안겨준다면야 그까짓 것 뭐 대단한 거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조숙해져서 성에 대한 관심도 부쩍 일찍 찾아오고 있으니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배울 수 있는 성교육은 빨리 시작하면 시작할수록 좋으리라.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집안에서 엄마 아빠가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서 되는 것 같지도 않다. 비슷한 또래의 남자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차이를 배우고 남자 어른들과도 자꾸 만나 ‘남성성’에 익숙해졌다면 아빠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그렇게 기겁을 하고 도망가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남성성’을 접할 기회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남자 선생님들이 좀 계셨으면 좋겠다. 물론 아이 엄마들조차도 남자 선생님을 불편해 하고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우려해 찾기도 어렵지만 설사 있다 해도 뽑지 않는다고 하는데 요즘 여자 간호사 일색이던 병원에도 남자 간호사들의 진출이 활발하다고 하니 이런 ‘남자 보육교사’에 대한 인식도 곧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제 딸을 셋이나 둔 아빠로서 좀더 깨끗하게 살기로 했다. 퇴근하면 일단 욕실로 가서 샤워하고 좋은 향을 풍기면서 아이들을 안아 주면 아이들이 아빠 품에서 더 오래오래 머물러 주지 않을까.
30대 후반의 광고기획자인 필자는 일곱 살 큰 딸 보미와 네 살 유나·지우 쌍둥이를 키우는 가장이다.
이경석 광고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