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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단체장76% “공천없애야”… 9%만 “유지해야”

입력 | 2014-01-10 03:00:00

[기초선거 정당공천 이대로 좋은가]
“공천폐지 어찌되나” 지방정가 혼란




#1. 전남 지역의 한 기초단체장 선거 출마를 준비 중인 A 씨(53). 정당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는 그이지만 “요즘처럼 몸을 사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읍면에서 열리는 행사나 모임 등에 참석하지만 정치적 발언은 극도로 자제한다. 가끔 주민들이 ‘정당 공천’ 이야기를 꺼낼 때면 “위(국회)에서 잘 알아서 하겠죠”라며 얼버무리곤 한다. 4년 전 지방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현 단체장에게 져 탈락한 경험이 있는 그는 내심 정당공천제 폐지에 찬성한다. 그럼에도 이런 속내를 드러내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A 씨는 “공천 문제로 ‘어른(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찍혔다가는 모든 게 끝이다. 그러니 입조심 몸조심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2. 올해 6·4지방선거에서 인천지역 구청장 출마를 결심한 B 씨(50)는 2010년 6·2지방선거 때 생긴 지역구 국회의원과의 앙금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그 지역 국회의원이 무소속 후보를 직간접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표가 분산돼 낙선했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구 국회의원을 만나기 위해 수차례 접촉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그는 2년 전 총선 때 도와달라고 한 국회의원의 부탁을 거절한 것을 무척 후회하고 있다. B 씨는 “공천 때문에 웃고 울었다. (정당공천제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어렵겠지만 폐지된다면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여의도에 쏠린 눈과 귀

요즘 6·4지방선거 출마 예정자들의 눈과 귀는 온통 여의도에 쏠려 있다. 기초단체장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여부에 따라 선거 전략이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 여야가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사이 기초단체장 출마자들도 어떤 게 유리하고 불리할지 계산에 골몰하고 있다. 공천제가 유지되면 당내 경선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반면 폐지되면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한다.

경기도청 고위 공무원 K 씨는 경기 지역 한 기초단체장 출마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다 최근 꿈을 접었다. 정당공천제가 유지되면 모 정당의 공천을 받아 시장 선거에 나설 계획이었지만 정치권에서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시간만 끌고 있기 때문이다. 공직 생활도 많이 남아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는 데다 촉박하게 선거를 치르는 것은 정치 신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여긴 탓이다. K 씨는 “게임 룰이 최소한 선거 6개월 전에는 나와야 하는데 너무 늦은 것 같다. 다음에 도전할지는 모르겠지만 공직 생활을 더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시장 선거에 나설 예정인 김오영 경남도의회 의장은 “빨리 방향이 결정돼야 출마 예정자들이 겪고 있는 혼선을 줄일 수 있다”면서도 “어차피 출마를 결심한 사람들은 공천제가 폐지되든 유지되든 앞만 보고 가야 할 형편”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국회의원이나 당 눈치 보는 것 보통 일 아니다”

출마 예정자들은 정당공천 폐지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여야 간 정략에 따른 입장차가 워낙 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러면서도 공천제 폐지를 가장 반기는 이는 현직 단체장들이다. 지명도와 인지도에서 단연 앞서기 때문이다. 3선 출마를 결심한 전북의 C 단체장은 “국회의원이나 당 눈치 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라면서 “종속이 아닌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말했다. 전남도의회 P 의원은 공천 문제를 100m 달리기에 비유했다. 그는 “공천제가 폐지되면 현역 단체장과 다른 후보 간의 차이는 단체장이 50m 앞서 출발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8년까지 해당 지역의 단체장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인지도가 생긴 것이 큰 강점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공천제 폐지가 현직 단체장에게 반드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재임 기간 중 주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단체장이라면 공천 폐지야말로 날개를 다는 격이 되겠지만 주민에게 인기가 없는 단체장이라면 자신을 엄호해 주고 바람막이가 될 ‘조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마다 온도차…여성계도 반발

특정 정당의 입김이 강한 지역일수록 정당공천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공천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철수 의원을 축으로 한 신당 출현 가능성이 커지면서 사정이 복잡해졌다. 안 의원의 신당 창당준비기구인 새정치추진위원회(새정추)는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기초선거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새정추 방침에 속을 태우는 쪽은 ‘안철수 신당’ 지지도가 높은 호남지역 출마 예정자들이다. 반대로 영남 지역 출마 희망자들은 당 간판을 떼고 붙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신당 측 출마자들은 민주당에 조직력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안철수 프리미엄’을 필수사항으로 꼽고 있다. 정당공천제가 폐지되면 사실상 무소속으로 선거를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 모 구청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G 씨는 “호남에서 신당 측 후보가 ‘안철수 마크’를 뗄 경우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안철수가 밀어주는 후보’라는 최대 무기를 잃게 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여성 출마자들도 이번 공천제 폐지 논란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각 정당의 공천에서 여성 할당제가 없어지면 여성 단체장 비율이 현저히 떨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광주 동구청장 선거 후보에 나서는 Y 씨는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적 보완 없이 정당공천제가 폐지된다면 오히려 정치가 후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당공천제 폐지 여부 결정이 늦어질수록 유권자들의 피해도 예상된다. 김기홍 광주경실련 사무처장은 “정당공천제 표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을 가릴 수 있는 변별력을 갖추지 못하는 등 올바른 선거 참여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광주=정승호 shjung@donga.com / 인천=차준호

울산=정재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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