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情의 회유 뿌리친 이후… 아내의 옥바라지는 시작됐다
6일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의 부인이 운영하는 롯데백화점 서울 강남점 지하 비빔밥집에 모인 동교동계 사람들. 왼쪽부터 권 고문, 이희호 여사, 권 고문 부인 박현숙 씨, 김방림 김옥두 전 의원,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한번은 내게 영세를 준 김수환 추기경님에게, 다른 한번은 아내의 생일에 보낸 것이다. 그것도 딱 한 번, 2006년 4월 8일 집사람의 생일 때였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이 짧은 편지를 써 보낼 때도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지만, 출소하고 난 뒤 겪은 작은 일 하나가 다시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 작은 일이란 아내의 손가락을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손마디를 꺾어 ‘딱딱’ 소리 내는 것을 신기해하던 손자가 “할머니도 한번 해 보세요”라고 졸랐는데 아내는 “나는 못한다!”며 손을 내저었다.
곧게 펴지지 않는 아내의 손은 마치 장작개비처럼 굳어 있었다.
“할머니 손은 왜 그래?”
“Working hard(일 많이 해서 그래요)!”
그 후 우리 집 가사를 25년째 도와주고 있는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니 아내는 젊은 시절 빨래를 많이 하고, 또 자영하는 식당 일 때문에 그렇게 손이 굳었다고 했다.
“그뿐인 줄 아세요? 겉으로 드러내 표시를 안 하시니 그렇지, 옥바라지 하는 동안 사모님이 마음 고생한 건 여자인 제가 더 잘 알지요. 알게 모르게 눈물로 세월을 보낸 거지요. 나이도 많은데 이러고 살아야 하느냐고….”
○유혹의 손길
차가운 방에서 자던 아이들이 독감에 걸려 콜록거리면 부랴부랴 아이를 등에 업고 이태원에서 약수동에 있는 ‘이강호 의원’까지 달려갈 때가 많았다. 이희호 여사의 오빠가 경영하던 그 병원에 가야 무료 치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인가, 중앙정보부가 유혹의 손길을 뻗쳐왔다. 김대중 선생을 배신하면 3000만 원을 주고 미국 유학까지 시켜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서울의 번듯한 집 한 채가 3백만 원 정도였다. 그 돈이면 당장 생활고를 벗어날 뿐 아니라 미국 뉴욕의 패션스쿨을 다닌 아내가 다시 유학도 할 수 있었다.
궁사남위(窮思濫爲)라고 했다. 사람이 궁하면 못할 짓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유혹을 뿌리쳤다.
그 다음 1976년 8월 초 내게 뻗어온 유혹의 손길도 떨치기 어려운 것이었다. 포철이사 자리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마저 단호히 뿌리쳤더니 당국은 나를 긴급조치 위반죄로 구속했다.
아내는 사실 그때부터 나를 옥바라지한 것이다.
○세탁기 구입
그 후 김대중 선생이 투옥돼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1978년 초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김대중 선생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철승 당시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난로라도 좀 넣어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줬다.
내가 인사차 찾아갔더니 이철승 대표가 작은 명함 봉투를 하나 주었다. 방을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가 봉투를 열어보니 5만 원이 들어 있었다. 큰돈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준 돈인지 알 수 없어 다시 들어갔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돈은 누구에게 주신 것입니까? 동교동에 주신 것이라면 갖다 드려야 하겠기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이철승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동교동은 따로 조치했으니 그건 자네 쓰라는 돈일세. 형편이 어려울 것 아닌가?”
“고맙습니다.”
나는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그 돈을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는 그 돈에서 3만 7000원을 꺼내 세탁기를 하나 샀다. 세탁기는 처음이었다.
○사랑하니까
아내는 인생의 동반자다.
옥중에 있을 때 미국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남편이 담배 파이프를 구경하다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 “저 파이프는 굉장히 비쌀 거야.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 진열해 놓았겠지?”
얼마 뒤 남편은 폐암에 걸려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는 의사의 통고를 받았다. 남편은 평생 가난한 노동꾼으로 살아왔다.
아내는 남편의 생일날 웃으며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파이프를 꺼내 남편 앞에 내밀었다. 눈을 뜬 남편은 몹시 놀랐다. 아내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살림살이를 아끼고 아껴 오랫동안 푼돈을 모아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남편은 폐암. 담배 파이프는 이제 무용지물이었다.
“왜 그런 짓을 했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감옥에 있을 때 나는 나 때문에 고생한 아내를 생각하다가 ‘지금 내가 왜 이곳에 다시 붙들려 들어와 아내에게 마음고생을 시키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됐다.
악연 때문이었다.
▼ 경기여고-이대 나와 美패션스쿨 유학… 지금도 대치동서 비빔밥집 직접 운영 ▼
권 고문의 부인 박현숙씨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생일이었던 6일,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은 이희호 여사와 동교동계 동지들을 서울 강남구 대치동 롯데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에 있는 비빔밥집 ‘예촌’으로 초대했다.
권 고문의 부인이 2000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식당이다. 식사에 열중하던 이훈평 전 의원(15, 16대)이 권 고문의 부인을 가리키며 특유의 입담을 쏟아냈다. 권 고문의 부인 박현숙 씨(77)는 식사를 마친 손님들의 식탁을 치우는 중이었다.
“(기자에게) 창혁아, 쩌∼기 형수 좀 봐라. 저게 미화 3000만 달러를 스위스 은행에 숨겨두고 있는 ‘재벌 부인’의 모습이냐? (현대 비자금 사건 때) 언론 보도로만 치면 형님은 대한민국 재벌 아니냐? 자식들한테 아파트 한 채라도 사주고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또 모르겄다. 형수 나이가 몇이냐! 감춰둔 돈이 그렇게 있으면 저 나이에 매일 식당에 나와 비빔밥 팔고 있겄냐?”
이훈평 전 의원은 권 고문의 목포상고 후배다. 권 고문은 이 전 의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딴소리를 했다.
“1989년이니까 13대 국회 때였어. 집사람이 서울 영등포 롯데백화점에 돈가스 가게를 냈는데 신문에 ‘롯데가 국회의원들에게 상가 분양 특혜를 줬다’는 보도가 터졌어. 사실은 롯데가 영등포 역사를 재개발하면서 당시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위원들에게 하나씩 준 것이었을 뿐 국방위원인 나하고는 관계도 없는 일이었는데….”
신문보도에 놀란 DJ가 권 고문을 호출했다.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 고문은 “(특혜 보도는) 저하고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집사람이 정식으로 임차한 겁니다. 그리고 (이제 국회의원도 됐는데) 언제까지 (남들한테) 얻어 쓰겠습니까? 직접 벌어서 쓸랍니다”라고 버텼다. 식구들과 먹고 살아야겠다는 얘기엔 DJ도 할 말이 없었다.
그 돈가스 가게는 2년 전에 접었지만, 비빔밥집은 아직도 운영하고 있다. “하긴 저렇게라도 매일 나와서 하는 일이 없었다면 형수는 진즉에 돌아가셨을 거야….”(이훈평)
박현숙 씨는 정치권에서 유명한 경기여고 44회다. 이회창, 이수성, 고건 전 국무총리, 이종찬 전 국정원장, 장재식 전 의원, 임동원 전 통일원 장관의 부인이 동기동창이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다니다 미국 뉴욕의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재원(才媛)이었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김대중 의원의 비서였던 권 고문과 결혼했다. 권 고문은 당시 39세였다.
“신붓감이 내 프러포즈를 받고도 차일피일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신붓감 아버지가 ‘김대중이라는 인물 밑에서 일하는 청년이라면 허술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큰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는 그분에게 정말 빚진 것이 많다. 따지고 보면 아내도 그분 덕에 얻었고, 결혼도 그분 덕에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권 고문이 말하는 ‘그분’은 두말할 것도 없이 DJ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