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세상을 바꿉니다/동아일보-채널A 공동 연중기획]미안하다는 말, 그렇게 어려운가요
김미판 씨가 10대 소녀와 상담 중인 모습. 김 씨는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낮은 자존감을 스스로 극복하고 자수성가해 청소년상담사와 복지사로 봉사하고 있다. 김미판 씨 제공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잘한다고 칭찬을 해줘도 곧이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떨어진 탓이다. 그게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자처하게 만들었고 대인관계에서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교회도 다녔지만 한마디 핀잔에 그날로 발길을 끊었다. 친구관계도 조금만 소홀히 한다 싶으면 단박에 단절했다. 그런 그녀는 늘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노력하면서도 스스로는 늘 모자란 사람으로 치부했다.
이런 질곡의 삶에 괴로워하던 2년 전. 한 씨는 그 원인이 엄마의 지속적인 경멸적 언어학대에 뿌리가 닿아있음을 깨닫게 됐다. 우연히 시작한 청소년심리상담 공부를 통해서다. 교과서에 소개된 내용은 하나같이 자신을 꿰뚫어 보고 분석한 듯 모두 자기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걸 분석한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게 됐다. 연구결과는 자신의 자기비하적인 성격이 어머니의 언어학대에 기인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사과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고 잘못된 자기평가도 바로잡을 수 있을 듯해서다.
2년이 지난 지금. 한 씨는 청소년상담사로서 자원봉사 중이다. 하지만 그 화해가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마음의 상처는 좀 극복했지만 이미 형성된 성격은 쉽사리 바꾸지 못해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눈에도 그녀는 아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듯 비친다. 그런 한 씨를 지켜봐온 각당복지재단의 박지란 실장은 안타까워한다. “마음의 상처는 이렇듯 깊어서 치유가 쉽지 않습니다. 또다시 긴 세월이 필요하겠지요.”
박 실장과 함께 각당복지재단에서 청소년상담사로 봉사하고 있는 김미판 씨(51) 경우도 비슷하다. 전남 함평에서 팔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란 김 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쓸데없는 계집애’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엄마의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김 씨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똑같은 이유로 중학교에 못 간 언니가 학비를 댄 덕분이었다. 김 씨는 중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해 완구공장에서 일하며 야간상고를 졸업했고 2008년 방송통신대(청소년교육과)에 진학해 4년 만에 학사모를 썼다. 김 씨도 한 씨처럼 심리적 어려움이 있긴 했으나 장애를 겪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데다 활달한 성격과 타고난 도전정신, 좋은 친구와 선의의 경쟁의식 덕분이다.
김 씨는 이렇게 말한다. “경멸적 언어로 학대를 받아온 청소년에겐 공통점이 있어요. 자기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에요. 그 아이들이 진정 원하는 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는 괜찮은 사람이다’ ‘넌 할 수 있어’ ‘너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요.” 김 씨는 스스로 도전해 자기능력을 증명함으로써 언어학대의 상처를 극복한 성공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언어학대 피해 청소년은 자존감이 낮아 홀로서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김 씨는 청소년 상담과 지도사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청소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자신의 상처를 교재로 삼아. 그녀는 사회복지사 청소년상담사 청소년지도사 등 세 종류 국가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로 현재 서울소년분류심사원(법무부 산하)과 청소년쉼터에서 상담자와 멘토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