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호를 만나다]<1>여상 출신 삼성전자 첫 임원 양향자 상무“아부지,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무거운 약속을 평생 지켰다
양향자 삼성전자 상무가 14일 대전 충남대에서 열린 ‘열정樂서’ 토크콘서트에서 ‘삼성 드림클래스’ 겨울캠프에 참가한 중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전=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본보는 지난해 10월부터 두 달간 총 6부 34회에 걸친 장기 시리즈 ‘신 여성시대’ 기획을 통해 대한민국 일하는 여성들의 현주소를 다양한 각도에서 짚어보았습니다. 새해에도 바통을 이어받아 ‘여성 1호를 만나다’라는 간판으로 여풍(女風)의 현주소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동안 인사 소식으로만 짧게 접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여성 1호’들을 발굴해 심층 인터뷰한 뒤 매주 오피니언면 기획란을 통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이 시대를 열심히 살고 있는 생활인들의 이야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 1호를 만나다’ 첫 회 주인공은 삼성전자에서 여상 출신으로 최초로 상무가 된 양향자 씨(사진)입니다. 》
세간의 관심에도 나서기를 꺼렸던 양 상무가 14일 오후 대전 충남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 상무는 이날 ‘삼성 드림클래스’ 겨울캠프에 참가한 중학생들의 멘토가 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에서 만난 양 상무는 “강연 요청을 받고 이틀 밤을 지새우며 인생을 되돌아봤다”고 했다. 남들에겐 평범한 강연일지 몰라도 자신에겐 누구보다 절실했고, 그래서 치열하게 살았던 날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날 초대된 중학생들은 모두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 섬 등에 사는 저소득층 아이들. 그는 30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더 고민했다고 했다.
“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제 고향은 전남 화순군 쌍봉리예요. 혹시 아세요?” 양 상무는 그렇게 산골소녀 시절의 향자로 돌아가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꺼냈다.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는 봉우리가 두 개인 산자락에 양씨와 정씨 200여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향자야, 이제 나는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 기력이 없었다. 퀭한 눈 때문에 별명이 ‘소 눈’이었던 아버지는 큰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동생들 잘 부탁한다.”
농사짓는 할아버지, 할머니, 광주 시내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남동생을 챙기는 건 어릴 적부터 나의 몫이었다. “아부지. 제가 알아서 할게.” 1982년 겨울 어느 날, 아버지와 했던 나의 첫 번째 약속이었다. 열다섯 살 때 일이다.
아버지를 떠올린 양 상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따 무대 위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기자님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 해본 적 있죠? 보통 사춘기 때는 선생님 잔소리 피하려고, 부모님한테 짜증이 날 때 하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이 말이 내 인생, 그리고 우리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무거운 약속이었어요.”
한때 대학교수가 돼 강단에 오르는 꿈을 꿨던 소녀 향자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없이 일주일 전 꼬박꼬박 눌러쓴 인문계고 입학 원서를 반으로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다음 날 광주여상 입학원서를 새로 썼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경기 기흥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메모리설계팀에 입사했다. 대졸 연구원들의 업무를 돕는 보조, 이른바 ‘시다바리’였다. 매일 오전 7시 출근해 복사 일부터 연구원이 던져주는 반도체 회로를 도면에 그려내는 단순 업무를 반복했다. 손은 주어진 대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욕망했다. ‘회로를 왜 저렇게 그리는지 알아야겠다. 더 배워야겠다, 더 공부해야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이 반도체 업계 1위였다. 회사에는 일본 선진업체들이 일본어로 출판한 기술서적이 많았다. 기술을 알려면 일본어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 말단 직원은 겁도 없이 사내(社內)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 연구원들의 텃세를 견뎌가며 매일 3시간씩 공부했다. 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공부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하는 여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연구원들이 번역이 필요한 일본 서적을 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기술 자료를 밤새워 번역하다 보니 반도체 설계 업무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따라왔다. 어느덧 반도체 설계 업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아이를 낳고 나니 바람은 더 커졌다. 부산 시댁에 맡겨놓고 한 달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훗날 부끄럽지 않을 엄마가 돼야 했다.
1993년 인사팀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사내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 입학원서였다. 여상을 졸업할 때 그토록 써보고 싶었던 대학 원서였다. “여사원은 사규상 뽑을 수 없다”는 인사팀 과장에게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이었기에 매일 오후 4시 퇴근 직후부터 오후 9시까지 수업을 들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3년 뒤엔 함께 입학한 남자 직원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입사 22년 만인 2007년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 수석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에서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도 땄다. 대학도 못 갈 줄 알았던 내가 석사라니….
양 상무는 조직의 일부를 책임지는 수석 자리에 오른 후 여성 리더로서의 장점을 본격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회사에서 후배들 사이 그의 별명은 ‘이모’. 든든한 이모처럼 후배들의 뒤를 지켜준다는 의미에서다. ‘열혈 부장’ 시절 그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중국 우한(武漢)에서 결혼하는 중국인 직원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휴가를 내고 비행기에 오른 것.
“중국 사람이니 당연히 외동아들일 거 아녜요. 이왕 간 김에 돌아가신 직원 아버님을 대신해서 축사도 직접 읽었어요. 축사 준비하면서 덤으로 중국어 자격증도 땄으니 일석이조죠.”
그리고 부장 6년차이던 지난해 12월 5일, 아버지 30주기 제삿날이었던 그날 아침 그는 당시 상사였던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양 상무, 축하해.”
30년 전 아버지가 하늘의 별이 됐던 그날, 그는 삼성의 별이 됐다. 그는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여상 출신 임원이다.
별을 달던 순간 아버지 얼굴부터 떠올랐다고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려고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 세월을 보상받은 거겠죠?” 아버지가 당부했던 대로 양 상무는 두 동생도 자랑스럽게 잘 키워냈다. 막냇동생은 누나를 따라 입사해 삼성맨이 됐다.
가족은 양 상무가 ‘지키기 위해’ 애써 온 존재이자, 입사 후 28년간 그의 삶에서 필요한 순간 가장 먼저 손길을 내어 준 은인들이다. “승진하고 나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드렸어요. 이미 양씨 문중에서 고향에 플래카드를 걸었더라고요. 열혈 시부모님 생각도 났어요. 아이 둘 대신 키워 주시느라 부산에서 결국 제 회사 옆인 수원으로 짐 싸들고 올라와 주셨거든요.”
떨리는 목소리로 무대에 올랐던 양 상무는 이날 강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제가 여러분의 30년 후 미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제가 미리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30년 후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저는 여러분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2000명의 학생이 보내는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우자 양 상무 눈에서는 끝내 참았던 눈물이 또 한 번 터져 버렸다.
▼ 양향자 상무가 걸어온 길 ▼
―1967년 출생
―1983년 인문계 진학 포기 후 광주여상 입학
―1985년 대학 진학 포기 후 삼성반도체통신 입사
―1990년 결혼 후 일과 가정일 병행
―1991년 출산 전날까지 근무하고 첫딸 출산
―1993년 메모리사업부 S램 설계팀 과장 승진
―1995년 삼성전자기술대 반도체공학 학사 취득
―2005년 한국디지털대 인문학 학사 취득
―2007년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 부장 승진
―2008년 성균관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취득
―2013년 입사 28년 만에 상무 승진
대전=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