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이타닉’
사람들의 시선은 소리를 지른 여성과 그 옆에 앉은 남자에게 일제히 쏠렸다. 곧 두 사람은 욕설을 섞은 거친 말과 함께 폭행을 주고받았고, 남자는 행사 진행요원들에게 극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사람들은 남자를 ‘이런 짐승 같은 놈이 있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영화담당 기자와 평론가, 그리고 주연배우와 감독이 모두 모인 언론시사회에서 급기야 ‘성추행’이 일어나다니…. 대학시절 서울 종로 뒷골목의 한 동시상영관에 홀로 갔다가 옆에 앉은 남자가 나의 허벅지에 손을 슬쩍 얹으며 “학생, 혼자 왔어?” 하고 느끼하게 물었을 때의 시린 충격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어디에 손대는 거예요”라는 말의 위력을. 해당 여성은 나쁜 뜻에서 이런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여성이 일단 “어딜 손대요?” 혹은 “어딜 만져요?”라고 소리치면 옆의 남자는 십중팔구 ‘몹쓸 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젊은 놈이 사람 치네!”도 똑같은 이유로 절대로 지지 않는 강력한 한마디가 아닌가 말이다.
#2. 영화 속에는 이처럼 웬만해선 부정하기 힘든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대사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대사가 “지금 행복하세요?”다. 이미숙 이정재 주연의 감성불륜영화 ‘정사’(1998년). 여기엔 건축가 남편과 열 살짜리 아들을 둔 중년여성 서현(이미숙)이 나온다. 서현은 여동생의 약혼자인 우인(이정재)과 불륜에 빠지는데, 그녀를 와르르 무너뜨리는 우인의 한마디는 바로 “행복하십니까?”였다.
잘나가고 잘생기고 가정적이고 바람도 안 피우는 남편, 똘똘한 아들, 있어 보이는 집, 돈 걱정 없는 생활…. 이 모든 걸 가진 여자지만 “행복하니?”란 질문을 받고는 ‘맞아. 난 너무 안정되고 단조롭고 생명 없고 반복적인 인생을 살아왔어. 내 영혼은 없었어’라고 후회하며 아이의 학교 지구과학실에서 몸 좋은 젊은 놈과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불러 터질 만큼 잘살아도 더 비싸고 나은 삶을 갈망하는 게 인간일진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욕구불만이 태동하지 아니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타이타닉’(1998년)도 마찬가지다. 호화 유람선의 3등석에 겨우 올라탄 무일푼 청년 잭 도슨(디캐프리오)은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귀족의 약혼녀 로즈(케이트 윈즐릿)의 마음을 단박에 훔쳐버리는데, 이때 도슨이 로즈에게 던지는 한마디는 이랬다. “침을 뱉어보아요!” 이 말을 들은 로즈는 ‘아, 그래. 나는 지금껏 귀족사회의 엄격한 룰에 짓눌린 채 내 맘대로 침도 못 뱉는 억압적 삶을 살아왔어! 난 이제 자유롭고 싶어. 귀족 남편이고 뭐고 다 팽개쳐버리고 이 자유로운 남자에게 목숨 걸 거야’라며 마음의 문을 벌렁 열게 되는 것이다.
#3. 최근 한 대학에 붙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보면서 나는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지기도 어려운 싸움을 걸었다’고 감탄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서 ‘사회의 부조리에 눈감고 사는 당신은 과연 안녕한 것이냐’는 투로 접근하는데, “네. 저, 완전 안녕해요. 전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살고 있거든요. 저, 지옥 갈 거예요. 감사해요”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느냔 말이다. 평당 3500만 원짜리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트레드밀(러닝머신)을 뛰는 순간에도 우리는 결코 ‘안녕할 수 없는’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이 갖는 이런 강력한 힘을 일거에 날려버릴 만한 영화 속 대사는 오직 하나뿐이다. 혹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이 명대사를 아시는지?
“너나 잘하세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