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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 200시간의 경청, 7년만의 소통…들어주니 풀리더라

입력 | 2014-01-16 03:00:00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국민권익위원회 사무실에 쌓인 민원서류 상자 사이에 선 국민권익위원회 고충민원특별조사팀원들. 왼쪽부터 송익범 조사관, 장태동 팀장, 정덕양 조사관.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하는 동안 일반인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고함을 지르면서 행사장에 잠시 긴장감이 흘렀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서울 마포구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P 씨(55)로 확인됐다.” ―동아일보 2011년 8월 16일자 A13면 ‘휴지통’ 코너 기사 》



며칠 뒤 P 씨 문제에 대해 청와대가 주관하는 국민권익위원회 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론은 ‘해결할 묘안이 없다’.

P 씨 사건은 권익위 고충민원특별조사팀으로 넘겨졌다. 같은 해 9월 넉넉한 인상의 장태동 조사팀장과 서글서글한 표정의 정덕양 조사관이 P 씨와 마주했다. 비쩍 마른 체구. 158cm의 키. 등산용 모자를 푹 눌러쓴 50대 여인의 얼굴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 독기엔 짤막한 기사로 요약될 수 없는 길고도 깊은 6년의 고통이 서려 있었다.

그는 서울 공덕역 지하철역 인근에서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했다. 2005년 공항철도 건설 공사가 시작되자 중개업소 앞 차도가 높아져 간판이 보이지 않게 됐다. 영업이 중단됐다.

그해 P 씨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보상을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권익위는 “보상 대상으로 보기 어렵지만 영업 피해에 대해 시행사가 지원 대책을 강구하라”고 답했다. 시행사인 D건설은 권익위의 권고를 외면했다. 주변 상인들에게만 합의금 200만∼300만 원을 줬다.

“당신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받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질 거야.”

D건설 관계자는 P 씨를 모욕했다.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D건설, 청와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권익위를 돌며 끊임없이 보상을 요구했다. 2009년 10월 국토부 청사 앞에선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2010년 4월엔 업무방해죄로 구치소에서 17일을 살았다. 정부와 D건설을 향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이재오 당시 권익위원장의 집 앞에 텐트를 쳤다. 권익위 앞에서 나체시위를 벌였다. 급기야 이 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도중 “D건설의 횡포를 시정하라”며 고성을 질렀다.

○ 그는 미치지 않았다

시위를 시작한 지 6년. P 씨의 삶은 파탄 직전이었다. 중개업소는 문을 닫았다. 서울 한 쪽방촌의 0.5평(1.65m²)짜리 단칸방으로 옮겨야 했다. 키 182cm의 고등학생 아들이 발을 뻗지 못할 공간이었다. 장 팀장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들의 몸무게는 40kg 남짓. 뼈만 앙상했다.

장 팀장과 정 조사관은 P 씨의 사연을 무작정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4시간이 흘러갔다. 열흘 뒤 다시 만났다. 또 묵묵히 들었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듣고 또 들었다. 그들의 ‘듣는 정성’에 여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더니 깊은 울분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정부와 대기업이 거짓과 기만으로 내 일생을 파멸시켰어요. 누구도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 들어주지 않았어요. 왜입니까! 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숭례문에 불을 질러 사회적 이목을 끌 겁니다! 대통령과 권익위원장에게 위해를 가할 겁니다!”

장 팀장과 정 조사관은 생각했다. ‘자신에게 생긴 감당 못할 고통의 원인을 대기업과 정부에 돌리고 있다. 자신을 극단으로 내몬 6년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집착이 느껴진다. 문제의 원인을 모두 바깥으로만 돌린 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나. 그는 미치지 않았다.’

장 팀장과 정 조사관이 다음 해인 2012년 3월까지 P 씨를 만난 횟수는 50차례. 만난 시간은 200시간(1회 평균 4시간)이 넘는다. 낮에 만나면 저녁에, 저녁에 만나면 밤이 깊어야 헤어졌다. 전화와 문자로 주고받은 대화는 셀 수도 없다.

“팀장님, 조사관님. 제가 진작 만났어야 했어요. 7년간 내 얘기를 이토록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P 씨의 분노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투쟁’을 끝내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 왜일까. 2012년 5월 어느 날, P 씨 스스로 권익위 사무실을 찾아왔다. “생활이 너무 어렵습니다. 아들도 더는 못 견디겠다고 해요. 우리,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장 팀장은 생각했다. ‘분노가 풀려도 망가진 삶이 돌아오진 않는다. 정상 생활의 회복, 그것이 P 씨를 치유할 유일한 대안이다.’

○ 구치소에서 보낸 편지

2011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낭독 도중 고함을 지르다 제지 당하는 P 씨. 동아일보DB

장 팀장과 정 조사관은 P 씨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도록 도와줬다. 낮은 이자율로 제공되는 임대주택을 구하고, 입주에 필요한 350만 원을 지원받도록 해당 기관들을 뛰어다녔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도움을 받아 공부방을 꾸며줬다. 임대주택으로 이사한 2012년 7월, 두 사람은 누구보다 기뻤다.

마침내 여인은 응어리를 풀었다. 직업을 찾아 아들과 정상적으로 생활할 것이며 앞으로 공공기관에 민원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이 각서는 당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 앞으로 전달됐다.

“주방도 없는 쪽방에서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보내며 폐인으로 절망의 삶을 7년이나 살았습니다. 자살을 해보려 했으나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억울하고 힘든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해 특별조사팀을 만들어 절망에서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원한을 희망으로 가다듬고 열심히 일해 아이와 다시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여인은 자신이 벌였던 과격시위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구치소에서 1개월을 지내야 했다. 업무방해죄 벌금을 내지 못한 대가였다. 그곳에서도 특별조사팀에 편지를 썼다. “여러분의 진심 어린 사랑과 관심 잊지 않겠습니다. 고이고이 간직하겠습니다.” 퇴학 위기에 몰렸던 P 씨의 아들은 올해 고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P 씨는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 폭탄 돌리기와 ‘2 대 8의 법칙’

고질, 악성.

고충민원특별조사팀이 다루는 민원 앞에 붙는 단어들이다. 폭언 협박은 기본이고 나체시위, 자살 위협, 공무원 폭행까지 치닫는다. 100건 이상의 민원을 수년간 집요하게 제기하곤 한다. 공무원들은 너나없이 손사래를 치며 외면하려 한다.

2011년 당시 이연흥 권익위 고충처리국장은 이런 민원들을 처리하지 않고 ‘폭탄 돌리기’를 하는 비정상적 관행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해 7월 특별조사팀이 신설됐다.

어떤 문제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악바리’ 장 팀장,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한 정 조사관 등으로 팀을 꾸렸다. 차분하게 상대를 감동시키는 송익범 조사관이 올해 새로 합류했다.

출범 2년 6개월. 악성, 고질이라며 조사팀에 넘겨진 민원 69건 중 60건을 해결했다.

“귀 기울여 듣는 것만으로 문제의 60%는 해결됩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의 비율을 2 대 8, 3 대 7로 해 정성을 다해 들어보세요. 그냥 듣는 게 아니라 공감의 추임새를 넣어주면서요.” 장 팀장의 신념이다.

“사람의 DNA가 다르듯 민원인의 요구도 다 달라요. 경청하지 않으면 A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B로 대응하는 잘못을 범하죠.” 정 조사관이 말했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분노가 마음의 병이 돼 민원에 몰두하다 보면 삶이 극빈해집니다. 민원을 들어주지 못해도 삶의 터전으로 돌아오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것이 근원적인 치유책이에요. 경청은 휴머니즘입니다.” 장 팀장이 이어 말했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 산골마을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장 팀장의 집은 가난했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간 적이 거의 없었다. 정 조사관은 30대 초반 직장을 그만둔 뒤 공무원이 될 때까지 5년 실직의 고통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악성, 고질 민원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편에 설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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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고충민원특별조사팀은 지금껏 해왔던 똑같은 방식으로 어떤 ‘큰 일’에 뛰어들었다. 고통과 호소를 귀 기울여 들었고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5년간 꼬여 있던 문제가 3개월 만에 풀렸다. 동아일보(2013년 12월 13일자 A1면) 등에 대서특필됐다. ‘밀양과 다른 군산…권익위 중재로 새만금 송전탑 5년 갈등 해결’이란 굵은 제목으로. ▶해당기사보기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정부와 주민의 극한 갈등을 보며 조사팀은 다시 고민한다.

“한계 상황에 다다른 개인에게 귀 기울이듯 한다면 어떤 사회갈등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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