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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슬픔이 기쁨에게

입력 | 2014-01-17 03:00:00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1950∼)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살아갈수록, 일본 만화 ‘시마과장’의 한 대사처럼 ‘저마다 업보 많은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멀리, 가까이,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다. 도처에 슬픔의 웅덩이, 슬픔의 구름장, 슬픔의 도가니다. 그래서 어쩌다 그늘 한 점 없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환해진다. 부모 된 사람들은 자기 아이가 그늘 없이 살아가기를 바랄 테다. 세상에 슬픔이 있다는 걸 아예 모르고 오직 기쁨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밝은 전망이 안 보이는 불안정한 시대이니만큼 더 그럴 테다. 그런 옹졸한 사랑으로 길러진 기쁨의 아이들은 슬픔의 사람들이 자기와 평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 아이들의 눈에는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도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도 보이지 않는다. 슬픔이 ‘어둠 속에서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그런 둔하고 차가운 마음이 세상을 슬픈 얼음장으로 만드는 것인데. 기쁨이 세상의 슬픔에 눈 돌리도록 하겠다는 결기가 안타까운 분노와 함께 서려 있는 시다.

정호승의 시를 김광석이 노래한 ‘부치지 않은 편지’를 듣고 있다.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혈관 속에 슬픔의 입자들이 가득 차 따끔거린다. 정호승 시들은 왜 이리 서러울까. 무슨 업보를 갖고 있기에.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