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징가제트도 지칠땐 찾아가죠, 엄마같은 저 산으로
칼바람이 부는 한강 잠수교 남단 부근에서 남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나경원 회장. 그는 거의 평생을 남산 자락에서 살았으며 지금도 그의 집 거실 창문 너머로 남산이 보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나경원(51) 역시 남산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남산타워도 단 한번도 오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거의 평생을 남산자락에서 살았다. 중구 신당동이나 용산 동부이촌동 등 집은 몇 번 옮겨 다녔지만 ‘뛰어봤자 늘 남산 발밑’이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결국은 남산 주위를 뱅뱅 돌며 사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지금도 그의 집 거실 창문 너머로 남산이 빤히 보인다.
“2008년 국회의원 공천을 참 어렵게 받았다. 서울 중구에 낙점됐는데, 난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여고를 나온 마포나 당시 살고 있었던 용산, 그것도 아니면 그때까지 단 한번도 한나라당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던 송파 병(19대 김을동 의원 첫 새누리당 당선)을 원했다. 공천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도대체 중구와 내가 무슨 인연이 있지?’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연도 보통 깊은 인연이 아니었다. 남산자락의 명동성당에 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도 남산 북사면에 있는 숭의여중을 나왔다. 나는 의식을 하지 못했지만, 난 남산손바닥 안에서 뛰어논 거다. 그때부터 수시로 남산을 찾았다. 편안하고 아늑하고 따뜻했다. 걷다보면 스르르 온갖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우리 네 딸은 한방에서 부대끼며 자랐다. 바로 아래동생이 두 살 터울, 셋째와 막내가 각각 다섯 살, 여섯 살 차이다. 내가 대학생일 때 막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정다운 친구처럼 지낸다. 둘째는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나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난 사법시험 공부 하느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첫째 다음에 둘째가 가라’며 꿈쩍도 안하셨다. 혹시나 사람들이 ‘동생이 먼저 가면 언니한테 무슨 결함이 있는 거 아니냐’고 여길까 걱정하신 거였다. 동생은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도대체 언제 시집가느냐? 언니 시험 합격할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며 투정을 부렸다. 셋째와 막내는 ‘언니들 또 싸운다’고 짜증을 내며 방을 뛰쳐나가곤 했다. 결국 1988년 11월 나란히 사법시험준비생이었던 우리 커플은 등 떠밀리다시피 백수부부가 됐다. 그해 우리부부는 둘 다 사법시험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그때까지 무수히(?) 떨어졌지만, 이젠 가정을 꾸려나가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다음해 남편(김재호 부장판사)이 합격했고, 난 그 후 3년이 지난 1992년, 대학졸업 6년 만에 긴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거기엔 ‘나징가제트’로 불렸을 정도의 무쇠체력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꼬마 숙녀’ 시절 나경원 회장(왼쪽)과 두 살 아래 동생. 나경원 회장 제공
“서울시장 선거가 끝난 후 아들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주자니 가슴이 울컥했다. 정치입문이후 10년 만에 직접 해주는 음식이었다. 나도 한때 요리학원도 다니고, 꽃도 가꾸고, 집안도 단장하고 그랬는데…. 도대체 ‘1억 원 피부클리닉’이라니 황당했다. 아는 사람이 1년에 500만 원쯤 된다고 해서 따라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기소청탁사건(무혐의처분)은 더 억울했다. 남편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단 한번도 내 선거운동을 도와준 적이 없다. 나도 원하지 않았다. 법관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기자들 전화가 빗발쳤고, 아이들은 불안에 떨었다. 나도 카메라세례를 받으며 경찰에 출두해야 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자기반성으로 결론 내리지 않으면 극복이 안 된다. 내가 세심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다. 내 뜻과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너무 빨리 컸던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좋은 약이 됐다. 붓글씨 공부한 지 한 1년 됐는데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다.”
그렇다고 나경원이 정치입문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스페셜올림픽도 그의 정치적 자산이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정치를 안했으면 어떻게 그런 큰일을 치러낼 수 있었을까. ‘판사 나경원’이 나섰으면 누가 도와줬을까. 판사는 ‘개인의 삶’을 바꿀 수 있지만, 정치인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나경원은 스스로 강단이 있다고 말한다. 손해 보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이다. 직선적이고 돌직구 기질이 다분하다. 음식도 뭐든 잘 먹는다. 개고기도 어쩔 수 없을 땐 피하지 않는다. 서울대 법대 1학년(82년) MT 갔을 때 “왜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되지 않느냐”고 당차게 항의하며 선배들과 다퉜던 것도 바로 그였다. ‘법대여학생(360명 중 11명)들은 치마 입으면 안 된다’는 권위적인 시대,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조국, 김난도 교수, 조해진 의원, 원희룡 전 의원 등이 그의 동기생들이다.
▼ “엄마보다 속 깊은 딸… 너는 내 삶의 비타민이야” ▼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다운증후군 딸’
수영장에서 딸 유나와 함께 즐거운 한때. 나경원 회장 제공
요즘 나경원에게 딸 유나는 삶의 비타민이다. 모든 게 다 예쁘다. 전화목소리만 들어도 유나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금방 안다. 유나가 어릴 땐 ‘딸과 놀아주기’가 취미였을 정도로 온 힘을 쏟았다. 뭐든 배우는 게 느려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반복해서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장애아 엄마는 그저 ‘죄인’이었던 것이다.
“1993년 애를 낳자마자 하늘이 캄캄했다.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연 내가 키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들었다. 출산 후 20여 일 후부터 석 달 동안 사법연수원시험을 보러 반포대교를 오가는 데 눈물바람으로 그 다리를 건너곤 했다(시험 동안 시어머님이 봐 주심). 무엇보다도 고마운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곧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를 다독였다. 그게 큰 힘이 됐다. 내가 이런 인터뷰를 하면 ‘장애인 딸 팔아 정치복귀’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느 장애인 엄마가 그럴 수 있을까. 난 칭찬받고 싶지 않다. 당당한 장애인 엄마가 되고 싶을 뿐이다.”
“유나를 어느 사립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는데, 그 교장은 의자에 앉아 일어서지도 않은 채 호통부터 쳤다. ‘엄마, 꿈 깨! 장애아 교육시킨다고 정상아 되는 줄 알아!’ 난 유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학교 운동장을 걸어 나왔다. 세상에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가 저럴 수가 있는가. 교육청에 징계요청을 했더니, ‘구두경고’했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2차 경험자라 그런지 나만큼 화를 내지 않았다. 여기에 더 속상했다. 그래서 교육청에 ‘어느 지방법원 판사’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움직였다. 그때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법과 제도를 바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그러려면 정치를 해야겠다고. 물론 꼭 정치를 해야만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건 지금도 고민 중이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나경원 약력
▲현직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 집행위원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회장 ▽한국장애인부모회후원회 공동대표 ▽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서울대행정대학원 초빙교수
▲저서 ▽세심(2010) ▽무릎을 굽히면 사랑이 보인다(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