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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뒷談]‘한국판 파파라치’의 세계

입력 | 2014-01-18 03:00:00

“연예 특종이라도, 수위 높은 사진은 미리 걸러내죠”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였어도 스타의 흔적은 남는다. 파파라치 정신으로 무장한 연예매체 디스패치의 카메라는 스타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잡아냈다. 왼쪽 위아래 사진은 ‘김태희-비’ 커플의 비밀 데이트 모습. 가운데 및 오른쪽 사진은 소녀시대 윤아와 이승기가 만나는 장면. 디스패치 제공

#지난해 12월 17일 오후 11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아파트. 아파트 주차장의 차 안에 누군가가 한 시간 전부터 앉아 있었다. 기온이 0도 가까이 떨어지면서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지만 그렇다고 시동을 걸어 난방을 켤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없는 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차장 입구에 검은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들어섰다. 한 남성이 내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더 숨을 죽였다. 5분, 10분…. 얼마나 지났을까, 까만 점퍼를 걸친 여성이 주차장에 들어섰다. 남성은 바로 SUV에 올라탔고 여성도 뒤따라 같은 차를 탔다. 카메라 렌즈가 쉴 새 없이 깜박였다. SUV에서 내린 남성은 이승기, 이 차에 동승한 여성은 걸그룹 소녀시대의 윤아였다.



2014년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이승기-윤아’ 열애 보도는 이렇게 터졌다. 명백한 증거인 사진 앞에 두 스타의 소속사는 곧바로 열애를 인정하며 ‘백기투항’했다. 연예계 사람들은 “이승기가 드디어 걸렸다”고 했다. 모범생 이미지의 이승기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열애설이 나지 않았던 연예인이다. 연예인 사생활과 관련해 숱한 특종을 일궈낸 연예전문 인터넷 매체인 디스패치 기자들도 “이승기 씨는 취재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했다.

연예인 사생활 보도는 저널리즘의 영역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대중의 말초적 호기심에 영합한 파파라치의 횡포인가. ‘한국판 파파라치’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파파라치? 파파라치!


“우리는 연예 탐사보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를 ‘파파라치’로 보더라고요.”(디스패치 기자)

서구에선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찍어 언론사에 파는 프리랜서 카메라맨들을 지칭해 파파라치(paparazzi)라고 부른다. 이 파파라치들은 스타들을 매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찍는다. 쇼핑몰, 피트니스센터, 파티장, 집 앞, 차 안, 심지어는 누드해변까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지 않는 곳은 없다. 특히 미국 할리우드의 파파라치들이 극성스럽기로 유명하다.

이 개념대로라면 한국에는 아직 파파라치가 없다. 프리랜서가 아니라 각 연예매체들이 자신들의 전문적인 보도를 위해 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매체들도 ‘파파라치’라고 인식한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찍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엄밀히 말하면 파파라치식 저널리즘인 것”이라고 풀이했다.



특종의 시작은 ‘그냥 지나가는 말’

취재팀이 만난 한 연예매체 기자는 “모든 열애설 보도의 시작은 그냥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주로 서울 청담동과 방배동, 신사동 등 연예인들이 자주 가는 음식점을 돌아보는 건 물론이고, A 가수의 지인에게 C 가수의 근황을 묻는 식으로 정보를 모은다”고 말했다. 예컨대 카라 강지영의 지인에게 “티아라 지연은 요새 뭐하고 지내요?”라고 묻는 식이다. 그러면 별 부담 없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일명 ‘뒷담화’ 심리를 이용하는 것.

“윤아가 승기 차에 타던데?” ‘이승기-윤아’ 취재도 지난해 9월 지인이 무심코 던진 이 한마디에서 시작했다. 디스패치 임근호 팀장은 그 순간 ‘윤아가 왜 이승기 차에 탈까’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 등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고 했다. 그 뒤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실마리가 풀렸다. “승기 요즘 데이트하는 것 같던데?”

이승기와 윤아의 조합은 특종거리였다. 현장을 잡아야 했다. 취재는 정교하게 이뤄진다. 만약 실수로 열애설 당사자에게 들켜 버리면 그들은 더 은밀한 곳으로 꼭꼭 숨어 들어갈 테니까. 디스패치 취재팀은 이승기와 윤아의 집 주소, 방송 스케줄을 일일이 파악했다.

“둘 다 스케줄이 워낙 많아서 일정을 파악하는 데만 보름이 걸렸어요. 두 사람의 일정을 같이 놓고 비어 있는 부분이나 다음 날이 쉬는 때를 찾았죠.” 그렇게 연결고리를 찾은 취재팀은 카메라를 들고 윤아의 집 앞에서 잠복취재에 들어갔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이승기와 윤아가 같은 차에 올라 한두 시간 동안 데이트를 즐긴 뒤 새벽에 윤아의 집 앞에서 헤어지는 장면이 포착됐다. 그간의 고생이 단 몇 초 사이에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다. 원빈과 이나영, 조인성과 김민희, 비와 김태희의 열애 사실이 이런 식으로 밝혀졌다. 모두 디스패치의 특종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또 다른 연예매체 기자는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사는 남자 배우를 봤는데 마침 시간이 남아서 그냥 따라가 보니 한 여자 가수가 그 배우의 차에 타고 있어 사진을 찍어 보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작발표회, 영화 VIP시사회 이후 열리는 뒤풀이나 파티도 연예매체 기자들의 집중 취재 타깃”이라고 귀띔했다.



열애설을 둘러싼 음모론, 진실은?

스타 커플은 ‘007 작전’을 펴듯이 밀회를 하지만 파파라치는 끝까지 추적해 이를 잡아낸다. 배우 이나영(왼쪽)과 원빈은 시간 차를 두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모습이 포착돼 열애 사실이 확인됐다. 디스패치 제공

지난해 7월 3일에 나온 배우 원빈과 이나영의 열애 보도는 뜻밖의 논란에 휩싸였다. 같은 날 가수 이효리와 이상순의 결혼설도 보도된 터였다. ‘파워 트위터리안’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외수 씨는 이날 “요즘은 연예인 스캔들이 터지기만 하면 또 뭔가 덮을 게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고위층의 비리가 불거질 때마다 연예인들의 스캔들이 ‘동시 상영’되는 바람에 너무 뻔한 수법이다 싶어 이제는 도무지 신뢰감이 안 간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정국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수사 등으로 격랑이 한창일 때였다. 누리꾼들도 열애뉴스가 터지면 열애설 자체보다 ‘이 열애설이 덮으려는 뉴스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부 누리꾼은 “불리한 내용을 덮으려고 정부가 열애설을 터뜨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예매체 기자들에게 ‘음모론’에 대해 물었더니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미치겠어요. 정말 아무 상관없어요. 그깟 연예뉴스로 덮어질 만한 사건들도 아니고….”

원빈과 이나영의 열애를 보도한 디스패치 기자들은 “정치적 현안은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조금 지나면 본격적으로 휴가철이 시작되니까 사람들 관심이 줄어들잖아요. 그 전에 기사를 내는 게 좋겠다는 내부적 판단이 있었어요. 또 수요일에 기사를 터뜨리면 그 여파가 주말까지 가는 법이거든요. 그래서 7월 초 수요일로 보도 날짜를 결정한 건데, 참….” 다른 연예매체 기자도 “연예계 사건사고는 천재지변처럼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라며 “그런 식으로 짜맞추면 1년 내내 나오는 모든 연예뉴스가 음모일 것”이라고 반박했다.

연예매체 기자들은 오히려 수사기관 측에 의혹을 제기했다. 한 기자는 “검찰이 연예인 연루사건을 발표하는 날짜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발표 시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연예보도도 룰은 지킨다

취재팀이 또 하나 궁금했던 것, 바로 ‘거래’다. 톱스타의 열애현장이 찍힌 사진을 세상에서 혼자 손에 쥐고 있다면 어두운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톱스타 입장에서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라도 사진과 맞바꾸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정말 수위가 높은’ 사진, 예컨대 숙박업소에서 나오는 사진이나 노출이 있는 사진은 연예인이 소속된 기획사와 기자 사이에 거래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또 보도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더 예쁘게’ 나오도록 재촬영을 할 거란 추측도 있다.

디스패치 기자들은 “그런 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해당 소속사에 기사가 나가기 전에 사진을 보여주지도, 재촬영을 하지도 않는다”며 “사진이 예쁘게 나온다고 칭찬해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가 쓰는 카메라는 다른 언론사가 쓰는 것과 비슷한 종류”라고 설명했다.

다만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거나 진한 스킨십을 하는 사진은 걸러내기도 한다”며 “스타들도 이미지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인간적인 배려를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열애설이 사실이면 그 사실을 증명할 정도의 사진이면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매체 기자도 “열애설을 보도하는 목적은 독자들이 흥미있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소재이기 때문이지, 톱스타를 망가뜨리기 위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5, 6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연예매체는 연예인들에게 카메라를 마구 들이대 마찰을 빚었다. 데이트 순간을 급습하자 화가 난 남자스타 A는 기자의 카메라를 빼앗아 부쉈고, 스타커플 B와 C는 차 안에서 입을 맞추다 카메라 플래시에 놀라 급히 가속페달을 밟았다가 사고가 날 뻔했다. 여배우 D는 운전 중 연예매체 차량이 잇따라 달라붙자 4차로에서 갑자기 U턴을 해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적도 있다.

이런 사건을 겪은 뒤 연예매체 보도는 근거리가 아닌 원거리 촬영으로 트렌드가 변했다. 성능 좋은 망원렌즈를 사용하면 굳이 가깝게 접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취재 기간도 되도록이면 한 달 이상으로 잡곤 한다. 그래야 ‘해당 연예인도 인정할 정도로 팩트에 충실한 보도’가 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찍혀서 영광”이란 반응도

열애설 보도에 대한 연예인과 일반인의 인식도 변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사진이 유포되는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고 퍼지는 범위도 넓어졌다. 그러자 아예 파파라치식 사진을 홍보에 이용하는 스타들도 등장했다.

‘공항 패션’은 이런 변화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스타들이 공항에 갈 때마다 출국일정을 연예매체에 보내고, 이른 아침부터 미용실에 들러 ‘풀 메이크업’을 한 뒤 공항에 나타나는 건 일상사가 됐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예전 스타들은 사인을 해달라고 몰려드는 팬들이나 집 앞에 줄지어 밤을 새우는 팬들을 보며 인기를 실감했지만 요즘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나 SNS에서 퍼지는 자신의 사진을 보며 인기를 가늠한다”고 말했다. 요즘은 파파라치 사진이 찍히면 “영광이다”라며 빙긋 웃고 가는 스타들도 있다고 한다.

연예매체들의 취재경쟁이 과열로 치닫지 않도록 절제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 전직 연예매체 기자는 “예전엔 우연히 발견해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미리 집요하게 분석하고 계획하고 추적하는 사례가 늘었다”며 “매체 간 경쟁이 불붙으면 연예인의 사생활은 점차 더 무장해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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