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는 한국 근대사에 빛과 어둠을 깊이 남겼다. 17세 때 일본 도진샤(同人社), 21세 때 중국 상하이 중서서원(中西書院), 24∼29세 때 미국 밴더빌트대와 에모리대에서 공부한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귀국 후 독립협회 회장, 대한자강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힘썼다. 1912년 일본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인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돼 3년을 복역했다. 그러나 차츰 친일로 돌아서 만년엔 국방헌금 기탁, 친일 강연 활동,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고 중추원과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으로 일본에 적극 협력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이 어제 미 에모리대에 1907년 윤치호가 한글로 애국가를 쓰고 서명한 문서가 보관돼 있다며 100인 환수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애국가는 작곡가가 안익태라는 것 외에 작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다. 윤치호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일부 나왔지만 도산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훼절한 친일파와 소신을 안 굽힌 독립운동가 중 누가 애국가를 작사했을까.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